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
- 최초 등록일
- 2011.02.18
- 최종 저작일
- 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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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말 구국 민족운동의 두 흐름,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에 대한 글입니다.
목차
Ⅰ. 개항 후 일제의 침략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
Ⅱ. 구국 민족 운동의 기원
Ⅲ.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의 도모, 애국 계몽 운동
ⅰ. 국권을 회복하려는 애국 계몽 운동
ⅱ. 교육운동과 언론활동, 식산흥업의 전개
ⅲ. 온 국민이 나라의 빚을 갚으려 한 국채보상운동
ⅳ. 공화정 수립을 주장한 신민회
ⅴ ‘애국계몽운동’ 개념에 대한 학계의 논의
ⅵ. 일제의 지배를 인정한 합법적 운동의 한계
ⅶ. 국민주권주의를 제창한 근대적 운동
Ⅳ. 무장 항쟁을 통한 국권 회복의 추진, 의병운동
ⅰ. 다시 불붙은 의병 항쟁
ⅱ. 전국으로 번지는 의병운동
ⅲ. 호남 지역 의병운동과 ‘남한대토벌’
ⅳ. 중부 이북지역의 의병과 근거지 이동
ⅴ. 조동걸의 `의병운동‘이 아닌 ’의병전쟁‘으로 불러야 하는 이유
ⅵ. ‘의병 서술’ 에 대한 학계의 논쟁
ⅶ. 반봉건․반침략을 내건 민중적 민족주의 운동
ⅷ. 실력적․사상적 한계로 말미암아 실패로 끝난 운동
Ⅴ. 포괄적 연구에 대한 조망
본문내용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여 일어난 항일운동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저항은 의병활동이었다. 그것은 근대적인 무기로 무장하고 조직적인 항쟁을 벌인점에서 종래의 독립협회나 언론의 소극적인 반항과 개인적인 상소․의거보다도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항일의병은 이미 1894년부터 일어나고 이듬해 민비시해와 단발령에 자극받아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는데(을미의병), 이 때는 종전에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던 농민들이 많이 가담하였고 그 지휘자는 대부분 지방의 명망있는 유학자들이었다. 을미의병은 ‘존왕양이’를 내세워 일본군과 일본거류민을 공격대상으로 삼았으며, 지방 관아를 습격하여 단발을 강요하는 친일 수령들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이 을미의병은 아관파천으로 친일정부가 무너지고, 고종으로부터 해산을 종용하는 조칙이 내려지자 일단 해산하였다.
반면, 애국계몽운동은 사상적으로 개화사상과 연결되는 것으로 특히 도시의 지식층을 중심으로 하여 근대적 의식을 가진 국민 대중에 기반을 두고 전개되었다. 처음 개화운동은 소수의 정치세력인 개화당에 의한 갑신정변으로 나타났다.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난 후, 보다 광범위한 국민적 기반을 확보한 독립협회가 국민계몽과 함께 정치운동을 전개했으나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족의 위기를 국민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자각이 일어났고, 이에 전국적 규모의 애국계몽운동이 다시 전개되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 함께보는 근현대사 』, 역사학연구소, 서해문집, 2004.
『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6. 근대, 김태웅, 솔출판사.
『 한국 근대사 산책 』4권,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 고쳐 쓴 한국근대사 』, 강만길, 창작과 비평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