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헌 홍대용의 실학사상
- 최초 등록일
- 2011.03.22
- 최종 저작일
- 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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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 실학을 대표하는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인 담헌 홍대용의 생애와 그의 주요 사상을 리포트 형식으로 작성한 글.
목차
담헌 홍대용의 실학사상
1. 홍대용의 생애
2. 기(氣)를 중시하는 경향
3. 인물균론(人物均論)
4. 이천시물(以天視物)의 방법론
5. 과학기술적 탐구정신
6. 주체적 역사의식
7. 경세사상
본문내용
담헌 홍대용의 실학사상
1. 홍대용의 생애
홍대용(1731-1783)은 나주 목사를 지낸 홍력(洪轢)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매우 박학다식하고 다재다능했던 통유(通儒)로서 북학파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다. 그의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이다. 12세에 당대 대유학자였던 이원행(李元行)의 문하에 들어가 유학을 공부하였고, 16세에 거문고를 배워 평생을 즐겼는데 그의 연주 솜씨는 일품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북학파 실학자들과 많은 교류관계를 가졌다. 1759년 29세가 되던 해에 칠십 노령의 과학자 나경적(羅景積)을 찾아 그의 인격과 과학기술에 감명을 받고 그와 함께 혼천의, 자명종 등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3년 후인 1762년 32세에 마침내 두 대의 혼천의와 자명종을 완성하였다. 이들을 충청도 천원군 장명에 설치하고 이 사설 천문대를 농수각(籠水閣)이라 불렀다.
1765년 34세 때에는 서장관으로 북경에 가는 숙부 홍억(洪檍)을 수행하여, 북경에서 엄성, 반정균, 육비 등가 친교를 맺었고 당시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구체적적으로 이해하면서 중국에 전해진 서양의 자연과학과 기술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이는 박지원의 연행보다도 15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는 44세가 되어서야 감역이라는 말단 관직을 맡았는데 이후 사헌부 감찰, 태인 현감, 영주 군수를 역임하였다. 특히 천문, 지리, 수학, 역술에 조예가 깊었고, 정치, 경제, 교육, 병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임하경륜」,「의산문답」,「담헌설총」,「유포문답」,「담헌연기」,「사서문의」,「삼경문답」,「심성문」등이 있는데 오늘날 「담헌서」에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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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