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보는 역사 성폭력 상담소 건립한 최영애님
- 최초 등록일
- 2011.03.28
- 최종 저작일
- 2010.05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남성위주의 역사를 여성위주의 역사로 생각해보는 차원에서
성폭력 상담소를 처음 세원 최영애님에 대해서 알아본 글과 견해 입니다.
목차
1. 평등한 분위기 속에서 자란 셋째 딸
2. 민주화 운동의 시작
3. 인권 찾기의 길을 열어준 유학
4. 성폭력상담소의 시작
5. 성폭력 상담소의 업적
6. 성폭력상담소 그 후
7. 나의 생각
본문내용
최영애는 ‘성폭력상담소’를 설립한 사람들 중 하나이다. 90년대 까지 ‘성폭력’이라는 단어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하길 꺼려하는 부담스러운 단어였다. 그러나 성폭력 근절을 위해 성폭력상담소의 사람들이 나서면서 이러한 현상은 많이 완화되었다. 여성의 인권을 위해 앞장서서 나섰던 최영애에 대해 알아보자.
1. 평등한 분위기 속에서 자란 셋째 딸
최영애는 친가, 외가 모두 기독교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최영애가 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의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4남 3녀 중 셋째 딸로, 집 안에서 한 번도 여자라고 불평등한 대우를 받은 적이 없이 모든 형제들과 평등하게 자랐다.
2. 민주화 운동의 시작
최영애는 집안의 영향을 받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대학교에 들어가서 교회를 다니지 않고 민주화운동을 하던 선배들이 만든 ‘파워’라는 서클에 들어갔다. 그 때 만난 사람들이 최영희 ‘내일신문’ 사장, 이미경 국회의원, 서경석 ‘한국시민단체협의회’ 사무총장, 김동환 목사 등이 있었다. 최영애는 목소리가 낭랑하고 고와서 집회가 있으면 성명서 낭독을 도맡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인지, 사람들에게 이끌려 다니는 것인지 회의를 느낀다. 그래서 ‘파워’를 그만두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3. 인권 찾기의 길을 열어준 유학
최영애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6년간 연애를 했던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고,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최영애는 남편이 다니는 대학에서 신학과가 없어서 종교학, 철학, 사회복지학 관련 강의를 청강과 특별수련생 자격으로 수강했다. 이 때 인종차별에 대한 사회복지학 강의를 들었는데, 이에 대해 최영애는 이렇게 말했다.
“강의 내용은 다수가 흑인이 되고, 소수가 백인이 되는, 흑인과 백인의 역할 바꾸기 프로그램이었어요. 다양한 영역의 차별과 억압을 보여주는 그 강의는 전율을 느낄 만큼 인상적이었죠. 인간관계에서 인종차별, 여성차별 등에 대한 고민을 새삼 하게 되면서 여성으로서 여성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미국 대학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려고 준비까지 다 마쳤는데 셋째 아이의 임신으로 못하게 됐죠.”
그 후 최영애는 임신 7개월에 한국에 귀국, 이화여대학원 여성학과에 진학했다.
참고 자료
이김정희, 『여성운동하는사람들』, 여성신문사, 2002, p23~44
강준만 외,『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운가-폭력적 남성우월주의의 종언을 위해』, 인물과 사상사,2000, p50~57
http://blog.naver.com/dngur0402?Redirect=Log&logNo=120109226836
http://blog.naver.com/toto3507?Redirect=Log&logNo=90079296240 서울대우조교성희롱사건
http://blog.naver.com/dngur0402?Redirect=Log&logNo=120109226836
http://blog.naver.com/violet6157?Redirect=Log&logNo=40002605306 김보은․김진관 사건
http://blog.naver.com/dngur0402?Redirect=Log&logNo=120109226836 김부남 사건
http://www.womennews.co.kr/news/46780
http://media.jinbo.net/news/view.php?board=news&nid=14837 최영애 소장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