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 최초 등록일
- 2011.04.13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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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 국공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에 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Ⅰ. 신문화운동
Ⅱ. 5. 4 운동
Ⅲ. 5. 4 운동의 영향
본문내용
내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일본의 항복으로 중국은 항일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국내의 평화를 요구하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전후 중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내전을 치렀다. 초기 국민당 이 우세하였으나 결국 농촌에서 토지혁명으로 농민의 지지를 얻은 공산당이 최종적인 승리 를 거두어 장개석의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대만으로 퇴각하고 대륙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3.1. 항일전쟁 후의 상황
13.1.1. 국공 양당의 충돌과 협상
종전이 가까워짐에 따라 국민, 공산 양당은 각각 종전후의 정권구상을 세웠다. 국민당은 이전부터 약속해온 훈정을 끝내고 헌정을 실시해야만 하였다. 그렇게 되면 국민당의 일당 독재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될 터였다. 그래서 국민당은 스스로의 주도하에 국민대회 를 소집하여 거기서 헌정 실시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기로 하여 헌정기에도 국민 당이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공산당은 각 당 각 정파가 참여하는 연합정부를 구상하 였다. 양당은 이와같이 전후 정권구상에서도 이견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양당의 충돌은 종 전후 일본군의 무장해제 과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소련이 전쟁 막바지인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자 일본은 다음날인 8월 10일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일본의 항복이 눈앞에 다가오자 양당은 일 본군의 무장해제를 둘러싸고 경쟁을 벌였다. 우선 공산당 총사령관 주덕은 10일 일본군 및 중국인 괴뢰정부군에 대한 무장해제를 지시하였다. 장개석은 공산군이 일본군 점령지를 접 수할 경우 세력이 크게 확대될 것을 우려하여 주덕에게 중앙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현재 의 주둔지역에서 머무르고 일본군 및 괴뢰정부군에 대한 무장해제를 하지 말도록 통고하였 다. 중국주둔 일본군 최고사령관과 괴뢰정부군에게는 국민정부군에게만 항복을 하고 항복 때까지는 현상을 유지하도록 명령하였다.
장개석의 통고에 대하여 공산군은 명확한 거부의 뜻을 표명하고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일 본군 점령지의 접수를 강행하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