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명나라 헌종 성화제에 대한 리포트입니다.
목차
■ 성화제 영정(影幀)과 연표
■ 황제 즉위 前
■ 황제 즉위 後
■ 유민의 난 : 형양(荊襄)의 난
■ 황제의 여난(女難) - 어머니
■ 황제의 여난(女難) - 만귀비
■ 참고 자료
본문내용
■ 황제 즉위 前
헌종 성화제는 명나라의 제8대 황제이다. 헌종이라는 것은 묘호(廟號)이고, 성화제란 그 치세가 성화라는 연호를 가졌던 데 근거한 호칭이다. 성은 주(朱), 휘(諱)는 견심(見深)이며, 초명은 견준(見濬)이다. 영종 정통제의 맏아들로 1447년(정통 12) 12월 9일에 태어났다.
1449년(정통 14) 오이라트의 수장 에센(也先)이 침입하자 영종은 병부시랑 우겸(于謙) 등 여러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환관 왕진(王振)의 말만을 귀담아듣고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에 나섰다가 토목보(土木堡)에서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당한다. 토목보에서의 패전과 함께 북경(北京)마저 포위당할 위험에 처하자 손태후(孫太后) 궁녀 출신으로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으며, 영종의 생모이다. 명청시대에는 서자(庶子) 출신의 황제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선황의 후궁이었던 친모와 선황의 황후를 모두 황태후로 높여 불렀다. 황제의 친모는 국모황태후(國母皇太后), 선황의 황후는 성후황태후(聖后皇太后)라고 각각 구분하여 불렀다.
는 재빨리 영종의 이복 동생 성왕(郕王) 주기옥(朱祁鈺)을 제위에 앉혔는데 이 사람이 바로 경태제(景泰帝)이다.
경태제는 영종의 맏아들인 주견심을 황태자로 삼고, 포로가 된 영종을 태상황(太上皇)으로 높이고 다음 해 연호를 경태로 고쳤다. 경태제는 우겸과 함께 에센의 침입을 훌룡하게 막아냈는데, 이를 북경보위전(北京保衛戰)이라고 한다. 에센은 한나절이면 북경을 공략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지만 명나라 군사들의 철통 수비와 일반 백성들의 가세로 인해 오히려 퇴로마저 막힐 지경에 이르자 결국 철수하였다.
<중 략>
■ 황제의 여난(女難) - 만귀비
일반적으로 여색을 탐하는 황제는 제위에 오르기 전이던 후이던 왕비나 황후를 제쳐놓고 궁녀들을 좋아했는데 그녀들은 대부분 어리고 아름다운 소녀들이었다. 당연히 이런 궁녀들은 제왕보다 나이가 한참 어렸다. 궁녀에서 황후가 되는 여성 중에 명나라 헌종 주견심의 비 만씨(萬氏)가 있는데 이들의 사랑은 보기 드물었다. 후궁에 어리고 아름다운 미인들이 수없이 많은데 주견심은 자신보다 19살이나 많은 만씨를 사랑했다. 이러한 일은 역사적으로 매우 보기 힘든 경우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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