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지역조사
- 최초 등록일
- 2011.05.02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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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구지명의 유래, 대구의 축제와 행사, 대구의 인물, 1. 시대별 대구의 모습(사진)-1910년대부터 현재까지 10년 단위의 사진과 설명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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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대구 지역조사
대구지명의 유래(달구벌)
삼국시대(5세기말~6세기초)
대구의 옛 이름은 다벌(多伐), 달벌(達伐), 달불성(達弗城), 달구화(達句火), 달구벌(達句伐)이라 표기 되었는데 ‘화(火)’와 ‘벌(伐’)은 촌락, 읍성을 뜻하는 말이며, 달(達)은 원(圓), 주(周) 등 넓은 공간을 의미한다.
삼국통일
이후 대구지역은 1개 군-수창군(壽昌郡)과 4개 현 - 대구현(大丘縣), 팔리현(八里縣), 하빈현(河濱縣), 화원현(花園縣)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지명들은 신라 경덕왕대에 고쳐진 것으로 원래는 위화군(火郡,) 달구화현(達句火縣), 팔거리현(八居里縣), 다사지현(多斯只縣), 설화현(舌火縣)으로 표기되었다.
신라시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당(唐) 문화의 영향으로 신라의 문물제도가 중국식(中國式)으로 정비해 가는 과정에서 벼슬이름이나 지방이름은 원칙적으로 2자의 한자로 개칭하였으며, 개칭의 방법은 음을 딴 것, 뜻을 따르는 것, 글자를 줄이는 것 등이 있었는데 달구벌이 대구(大丘)로 바뀐 것은 음을 딴 경우에 해당한다 하겠으며, 성주군, 수창군의 영현(領懸)으로 소속되어 고려초까지 계속되었다.
조선시대
영조 26년(1750)에는 대구(大丘)의 유생(儒生) 이양채(李亮采)가 대구의 구(丘)자가 공자의 이름인 구(丘)와 같은 자이므로 공자의 이름을 직범(直犯)하여 인심을 불안하게 할 우려가 있다 하여 이를 바꾸고자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정조(正祖), 헌종(憲宗)때는 대구(大丘)와 대구(大邱)가 혼용되다가 철종(哲宗) 이후에는 대구(大邱)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시대(大韓帝國時代)
도제(道制)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지방제도가 갑오개혁(1894년)을 계기로 혁파되어 1895년 지방제도 개정에 관한 건(칙령 제98호 1895. 5.26)에 의하여 전국의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府制)로 개편 시행함에 따라 대구도호부(大邱都護府)는 대구부(大邱府)로 개칭되었으며, 대구군 등 23개군을 관할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시대(日帝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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