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顯宗實錄』과 『顯宗改修實錄』의 비교를 통해 본 갑인예송에 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11.05.18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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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6세기는 선조 대 이후 붕당 간의 상호 견제와 대립이 무르익어 가던 시기였다. 특히 인조반정을 함께 주도했던 서인과 남인간의 공존이 오랜 평화 시기를 거치며 ‘북벌’이란 대의는 사라지고 內治에 치중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각자의 학풍에 따라 서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에 성리학에서도 ‘禮學’의 문제를 두고서 상이한 해석을 하였는데, 특히 현종 당시에 있었던 두 차례의 복제 문제를 가리켜 ‘예송 논쟁’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두 차례의 예송 가운데 특히 현종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 된 ‘甲寅禮訟’을 중심으로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을 비교를 통해서 사건의 전개과정을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예송 논쟁의 전개 과정
3. 두 실록의 비교를 통한 갑인예송의 전말
4. 맺음말
본문내용
1. 들어가는 말
16세기는 선조 대 이후 붕당 간의 상호 견제와 대립이 무르익어 가던 시기였다. 특히 인조반정을 함께 주도했던 서인과 남인간의 공존이 오랜 평화 시기를 거치며 ‘북벌’이란 대의는 사라지고 內治에 치중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각자의 학풍에 따라 서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에 성리학에서도 ‘禮學’의 문제를 두고서 상이한 해석을 하였는데, 특히 현종 당시에 있었던 두 차례의 복제 문제를 가리켜 ‘예송 논쟁’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두 차례의 예송 가운데 특히 현종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 된 ‘甲寅禮訟’을 중심으로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을 비교를 통해서 사건의 전개과정을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2. 예송 논쟁의 전개 과정
먼저 1차 예송은 ‘己亥禮訟’이라 하는데, 효종 사후(1659년) 인조의 계비였던 조대비(자의대비)의 상복 기간을 얼마로 할 것인가를 두고서 두 붕당이 맞서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喪禮를 주관하던 영의정 정태화는 대왕대비의 복제에 관한 五禮儀의 전례가 없음을 들어 三年服과 朞年服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여러 대신들과 논의하였다. 당시 왕세자가 지명한 두 贊善인 이조판서 송시열과 우참찬 송준길의 견해를 따라 “古例의 禮律은 이미 異同이 있고 제왕의 制는 더욱 가벼이 논의하기가 어려운데 모든 대신들이 이미 時王之制로 논의가 되었으니 신 등은 감히 다른 설을 다시 용납할 수가 없사옵니다.” 『顯宗實錄』권1, 오월 을축조
고 하여 기년복을 택하였으나 당시 남인의 거두였던 윤휴는 『儀禮』 「斬衰章」의 ‘첫째가 죽으면 嫡妻의 차자를 長子로 세워 이 또한 장자라고 한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비록 효종이 소현세자 다음에 오는 차자였지만 엄연히 장자를 대신하였기 때문에 장자에 갈음하며 따라서 삼년복이 맞다고 맞섰다. 결과적으로 정태화는 송시열의 의견을 따라 國制에 ‘부모가 자를 위해서는 장자와 차자를 분간하지 않고 모두 기년복을 입는다’는 대목을 내세워 기년복을 입기로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