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사림, 왜란, 왕조중흥
- 최초 등록일
- 2011.05.22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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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다시 찾는 우리역사 요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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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제 5장 사림의 성장과 그 문화
1. 부의 집중과 공납ㆍ군역의 과중
1) 토지집중과 상업발달
토지겸병은 과전제도가 무너지면서 시작되었는데, 왕실의 내수사에서는 장리가 고리대로 이용하여 재산을 모았다. 명종 때에 이르러 진전제가 폐지되자 관인들은 여러 방법을 통해 사유지를 확대하였다. 통지겸병의 성행으로 인해 농민의 계급분화가 이루어지고 국가의 전세수입이 줄었으며, 병작관계는 악화되었다. 농민들은 농업에서 상업으로 업종을 변경하여 토지가 잃은 후 생계를 이었으며, 농민들의 불만으로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2) 농민부담의 과중
농민들의 부담은 16세기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는데, 전세는 하향조정 되었으나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진전에도 세를 거두어 부담이 가중되었다. 공납과 군역의 경우도 부조리한 점이 많아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이로 인해 농토를 버리고 유랑하는 농민이 증가하였고, 중종 때에 이르러서는 군역이 모병제로 바뀌어갔다. 환곡제도 농민들을 괴롭히는 제도 중 하나였다.
3) 임꺽정 일당의 폭동과 정여립 반란
농촌사회가 동요하자 도적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중앙정부의 전복을 노리는 반란세력도 등장하였다. 폭군인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은 백성들이 대신들과 손잡고 왕을 바꾼 첫 예시이다. 명종 때에 이르러서는 임꺽정이라는 백정이 사림, 아전, 노비, 평민을 모아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를 장악하여 부정한 세력과 싸웠다. 율곡이이의 제자인 정여립은 사림학자였으나 서인정치를 비판하며 급진적 동인과 연계를 맺었다. 또한 대동계라는 결사를 조직하여 새로운 왕조의 건설을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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