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고산 윤선도, 면앙정 송순의 작품과 일생
- 최초 등록일
- 2011.06.11
- 최종 저작일
- 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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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전 시가 수업 시간에 작성했던 레포트입니다.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목차
Ⅰ. 송강 정철(松江 鄭澈)
1. 정철의 일대기
2. 관동별곡
3. 사미인곡
4. 속미인곡
Ⅱ.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 윤선도의 일대기
2. 정철의 시 세계와의 비교
3. 어부사시사
4. 오우가
Ⅲ. 면앙정 송순 (宋純)
1. 송순의 일대기
2. 면앙정가
3. 곳이 진다 하고
4. 풍상이 섯거친 날에
5.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여 내니
※참고도서 및 자료
본문내용
Ⅰ. 송강 정철(松江 鄭澈)
1. 정철의 일대기
정철은 중종 31년(1536) 서울에서 출생했다. 자는 李涵(이함), 松江(송강)은 그의 호다. 조부 규는 건원능참봉이고, 부 유침은 돈녕부판관인데 대사간 안팽수의 딸을 취하여 4남 2녀를 두니, 자․소․황․철이다. 그의 큰누이는 인종의 귀인이었으며, 둘째 누이는 월산대군의 손자이며 계성군(성종의 셋째아들)의 양자인 계림군 유의 부인이었기에 그는 어릴 때부터 궁중을 자주 출입하며 어린 경원대군(慶原大君:뒤에 明宗)과 벗으로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10세 되던 해인 1545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의 맏형은 장형을 받은 후 유배 도중에 죽었으며, 그도 아버지를 따라 관북, 정평, 연일 등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등 일가가 몰락하게 되었다. 이런 환경으로 인해 송강은 유년 취학이 어려웠다.
1551년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조부의 산소가 있던 전라도 담양의 창평 당지산 자락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10년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임억령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 송순, 기대승 등 당대 최고의 학자와 시인들에게 학문을 익혔으며 이이, 성혼, 송익필 같은 또래의 유생들과 친교를 맺었다.
17세에 성산 지방의 부호였던 유강항의 딸과 결혼하여 4남 2녀를 낳았다. 또 26세에 진사시에 일등으로 합격했고, 이듬해인 1562년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가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자 어린 시절 함께 놀았던 명종이 그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성대한 축하연을 베풀어주기도 했다.
그의 첫 벼슬은 사헌부 지평이었는데, 그가 이때 처음으로 다룬 일은 국왕의 사촌동생이 저지른 살인 사건이었다. 명종은 정철을 따로 불러 그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부탁하였지만 그는 왕의 부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사형에 처해버렸다. 이에 화가 난 명종은 그를 지방으로 좌천시켰다.
그 후 지방의 관직을 떠돌던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다시 중앙으로 올라왔으며, 31세에 이르러 정알, 직강, 헌납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가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율곡과 함께 뭇 유생들이 선망하던 독서당에서 사가독서(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하였다.
이어 수찬, 좌랑, 종사관, 교리, 전라도 암행어사 등을 역임한 후 40세가 되던 1574년 벼슬을 내놓고 낙향하였다. 그가 벼슬을 내놓은 것은 자신의 주장을 결코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의 강직한 성격은 가는 곳마다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그것은 곧 당쟁의 불씨가 되었다. 서인이었던 그는 동인의 영수 김효원을 맹렬히 비판하기도 하여, 친하게 지내던 이이로부터 조정을 혼란시키는 정쟁을 일삼지 말라는 충고를 받고 실망하여 낙향했던 것이다.
참고 자료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http://old.haenam.go.kr/ -해남군청
http://www.ahg21.com.ne.kr -한글사랑 겨레사랑
두산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