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투쟁으로서의 4·3문화운동 서설
- 최초 등록일
- 2011.06.20
- 최종 저작일
- 2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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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논문해설및 해석
목차
1. 대항기억과 진실을 찾아서 2
2. 1980년대까지의 4․3의 관제기억과 사회적 기억들 2
3. 4․3진상규명운동의 전개와 그 성과 3
1) 진상규명운동의 초기적 전개
2) 진실찾기와 진실포착의 일차적 성과- 4․3 인식의 재조정
3) 진상규명운동의 본격화와 그 성과
4) 진상조사보고서의 발간과 그 의미
4. 4․3문화운동의 발생과 전개 7
1) 4․3의 진실회복의 가능성과 한계- 5․18의 경우와 비교하며
2) 4․3문화운동의 태동
⑴ 추모․위령제
⑵ 위령을 넘어서- 4․3문화운동의 태동과 그 주체․조직
3) 4․3문화운동의 전개양상과 특징-4월제를 중심으로
5. 4․3문화운동의 의의와 전망 10
<추가 내용> 12
본문내용
<추가 내용>12
기억투쟁으로서의 43문화운동 서설- 김영범
1. 대항기억과 진실을 찾아서
43은 공식역사 속에서 1948년 4월 3일 미명에 제주도 전역에서 좌익 무장대 조직이 경찰관서와 우익인사들을 습격한 사건으로 기술되었고, 결국 패퇴하고만 무장봉기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수십만 제주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43은 훨씬 이상의 것이었다. 가족친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떼죽음과 행방불명, 결코 되새기고 싶지 않은 온갖 고통과 오욕의 체험, 사건 종결 후에도 늘 상 따라다닌 정치적 핍박과 소외, 그로부터 입게 된 크나큰 심리적 상처들… 43에 대한 제주사람들의 기억은 대체로 그런 내용으로 구성되어 왔다.
이에 대해 국가는 43의 성격을 일찌감치‘공산폭동’으로 규정지어 주민학살 행위에 대한 합리화를 기도하고 면죄부 부여의 근거로도 삼았다. 반공국가의 시선으로는 43 당시의 제주도 주민들 상당수가 ‘빨갱이’ 또는 ‘폭도’였다. 또한 유족이나 후손들도 촘촘한 연좌제의 그물망이 계속해서 그들을 옥죄었다.
43이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고 잊고 싶지만 잊혀 지지 않는 역사적 비극이었다면,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고 상처는 치유되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는 그와 반대였다. 학문적 접근조차도 그 통로가 오래도록 차단되어왔으며 자기 안보에 급급했던 반공국가와 그 체제를 극력 엄호부지해온 극우세력은 43의 진상을 일방적으로 재단해버리고 인과관계 해석권도 마냥 독점했다. 그리하여 43의 진실은 탐사하고 발굴해볼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은 채 철저히 봉인되어 있었다.
참고 자료
기억 투쟁과 문화운동의 전개- 강창일, 역사비평사, 2004
제주 43연구-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사, 1999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 사진 김기삼, 글 김동만, 제주민예총43문화예술제 사업단 엮음, 각, 2004
43과 역사- 제주 43 연구소, 각,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