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신사참배에 대한 한국교회의 투쟁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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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는 총칼을 앞세워 그들의 민족종교중 하나인 신사신도를 세계의 종교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 첫번째 제물로 한반도를 공략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사는 우상숭배인가 아니면 국가의식인가 하는 문제로 한국교회는 처절한 투쟁과 수난을 당하게 되는데 그 결과로 한국교회에 큰 분열이 일어나고 장로교 신학의 양극화 현상이 도래하였다.목차
Ⅰ. 서 론 11. 연구동기와 목적
2. 연구방법과 범위
Ⅱ. 신도의 본질과 메이지유신 2
1. 신도의 기원과 성격
2. 신도의 국가의식화 정책
Ⅲ. 1910-1945년의 신사문제 4
1. 조선 총독부의 신사정책 강화
2. 신사참배 거부사건
3. 기독교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
4. 교회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
Ⅳ. 신사참배에 대한 한국교회의 투쟁 9
1. 신사참배에 대한 투쟁의 배경
2. 평양신학교의 투쟁
3. 장로교의 조직적인 투쟁
1) 총회의 투쟁
2) 지교회들의 투쟁
3) 개인의 투쟁
Ⅴ. 결 론 15
1. 교회의 분열
2. 장로교 신학의 양극화
3. 한국교회의 목회방향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총회의 투쟁총독부는 1938년 제27회 총회에 신사참배 결의 안건을 상정하도록 온갖 준비를 갖추었다. 그들은 먼저 장로교회의 유력한 지도자 몇 사람을 일본에 보내어 신사참배에 대한 이해를 갖고 돌아와서 한국교회를 유도할 계획을 세웠다.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하고 있는 이승길목사를 포섭하는데 성공한 기독교친목회 오문환은 동년 5월24일 이승길, 김은순, 장운경 등을 일본으로 데리고 가 일본교회들을 방문하면서 백방으로 회유하였고 돌아와서는 그들로 하여금 신사참배의 정당성을 강조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전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총독부는 더욱 철저한 각본과 계획을 세워 마지막 보루인 장로교총회를 유린하기에 이르렀다.
총회 개회 전일에 평양 경찰서장은 꾸며진 각본대로 평양. 평서. 안주 3노회 대표를 불러 평양 노회장 박응률은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고 애국적 국가의식이므로 기독교인들은 솔선 여행해야 된다는 것을 제안하고, 평서 노회장 박임현은 신사참배의 결행을 동의하고 안주 노회 길인섭은 재청할 것을 강요하여 내락을 받았다. 동일에 선교사들을 경찰서로 불러 “총회에서 조선인 대표가 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을 피력하기 위하여 신사참배 결의를 제안하는 데 대하여 국적을 달리하는 선교사들로서 이것을 저지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은 타당치 못한 처사”라고 전제한 뒤에 저지행동을 취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서명을 요구하였으나 선교사들은 이에 불응하였다. 경찰의 강요에 눌려서 총회 장소를 신의주로부터 평양 서문밖 교회로 옮긴 제27회 장로회 총회는 1938년 9월 9일 오후 8시에 역사적인 막을 올리게 되었다.
다음날 오전 9시 30분 총회가 재개되었을 때에 교회당 내외에는 수백 명의 사복경관으로 완전 포위되었고 강대 아래 전면에는 평남 경찰부장을 위시하여 고위경관 수십 명이 긴 검을 번쩍이면서 기라성같이 자리를 잡고 앉았고 총대들의 좌우에는 그 지방 경찰관 2명씩 끼어 앉았고 실내 후면과 좌우에는 무술경관 97명이 눈을 부라리고 서 있었다. 그 살벌한 분위기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으며, 주기철 목사, 이기선 목사, 김선두 목사 등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하는 유력한 교회 지도자들은 사전에 모두 구금되었고 저들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끌려온 27노회(만주 4노회 포함) 대표(목사 88명, 장로 88명, 선교사 30명) 총 206명이 넋을 잃고 앉아 있을 때에 10시 50분 이미 조작된 가본대로 평양. 평서. 안주 3노회 연합대표 평양 노회장 박응률 목사의 신사참배의 결의 및 성명서 발표의 긴급 제안이 있었고 박임현 목사와 길인섭 목사의 동의와 재청이 있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전신을 떨면서 “이 안건이 가하면 예라고 대답하십시오”라고 물었다. 이때에 제안자와 동의. 재청자의 10명 미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예”라고 대답했고 그들 외의 전원은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은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표시하는 것으로밖에 보여지지 않았으므로 수백 경관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일대 위협을 표시했다. 당황한 총회장은 “부”를 묻지 않고 그냥 만장일치의 가결을 선언하였다. 이때에 이런 사태가 있을 것을 예상한 선교회는 약속해 두었던 대로 방위량(W. N. Blair) 선교사를 선두로 2, 3명의 선교사들이 회장의 불법적이고 일방적인 진행에 대하여 항의하였다. 그리고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주장하려고 했으나 경찰관의 강력한 제지로 발언이 막히자 선교사 30명이 차례로 기립하여 “불법이오, 항의합니다”라고 외쳤다. 봉천노회 소속 한부선(B. F. Hunt, 韓富善)목사는 무술경관의 제지를 뿌리치고 불법에 대한 항의를 외치다가 그들에게 붙들려 옥외로 축출 당하기까지 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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