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재 사이에서 수원 화성을 바라보다
- 최초 등록일
- 2011.07.14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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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수원 화성과 화성행궁에 대한 탐방기사형식의 레포트 ♥ A+
수원화성, 화성행궁 답사기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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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역사와 현재 사이에서 수원 화성을 바라보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당쟁에 휘말려 불안한 마음가짐과 그로인한 파행, 자신의 남동생의 등용에 불만을 품은 숙의 문 씨의 이간질로 인해 더 이상의 자제심을 잃은 영조가 햇볕이 내려 쬐는 여름날 그를 문초한 뒤, 뒤주에 가두고 밖에서 못을 박아 8일 만에 죽게 되었다. 그 때 세자의 나이는 1762년 28세였다. 이 사건은 전대미문의 극형으로 전해지는 사도세자의 죽음이며, 현장에서 11살 된 훗날의 정조인 그의 아들이 할아버지인 영조의 옷을 부여잡고,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으나, 영조는 끝끝내 손자의 애원을 무시하였다. 이를 지켜보았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남다른 효심이 생겨났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인해, 폐해가 극심했던 구 정치체계의 개혁을 위해, 그리고 은퇴 후 수원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해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화성행궁을 신축했으며 화성을 쌓았다.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을 1789년 풍수지리상 최길지(最吉地)의 명당으로 지목된 수원 화성으로 옮기면서부터 정조대왕은 화성을 자신의 또 다른 고향이라고 여겼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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