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반상차대가 엄격했던 조선후기 사회에서 서출로 태어나 사회적 제약이 있었지만 정조의 독특한 정책덕분에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자신의 서출이란 신분에 따라 사회적 제약에 구애되지 않고 활발히 활동하였고, 그래서 당시 상대적으로 관심권 밖에 있었던 발해의 역사를 다룬 『발해고(渤海考)』를 편찬하는 업적을 세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유득공은 발해사 연구의 선구자이자, 한국에서 발해사를 연구하는 학자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 연구자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유득공은 『발해고』외에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서들을 편찬하였고 우리는 그 속에서 그의 역사적 고찰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저술 가운데 한국사 및 그와 연관된 사항에 관해 논리가 명확하고 반복적인 것들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견해와 역사의식을 파악해보고자 한다.
목차
< 목 차 >
Ⅰ. 머리말
Ⅱ. 본 문
1. 泠齋 柳得恭의 生涯와
交遊
2. 유득공의 歷史認識의 배경
3. 유득공의 역사인식
1) 기본적 역사 인식 태도
2) 二十一都懷古詩
3) 渤海考
4) 四郡志
Ⅲ. 맺음말
본문내용
1. 泠齋 柳得恭의 生涯와 交遊
유득공의 자(字)는 혜풍(惠風)ㆍ혜보(惠甫)이고, 호로는 영재(泠齋)ㆍ고운당(古芸堂)ㆍ영암(泠菴) 등이 있다. 특히 고운당은 운동(芸洞)이라고도 불리던 교서관동(校書館洞)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당호다. 그 중에서도 흔히 영재 유득공이라 칭한다. 그의 생애는 당연히 그의 역사인식에 있어 중요한 배경이 되므로, 그의 역사인식과 관련된 시기와 사실을 위주로 생애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출신과 가계
유득공은 문화(文化) 유씨로 그의 출신은 고조부인 유성구(柳聖龜)로부터 결정되었다. 유성구는 후처 전주이씨를 들여 아들 유삼익(柳三益)을 낳았는데, 그가 유득공의 증조부다. 『문화유씨세보(文化柳氏世譜)』에 의하면 처첩 여부를 구분할 수 있는 사항은 없지만, 유성구와 초취(初娶)한 전주이씨의 묘소에 대해서는 사조(四祖)와 묘소 등을 밝힌데 반해, 후취한 전주이씨에 대해서는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후취한 처의 아들인 유삼익은 서자라고 판단할 수 있고, 그 뒤 증조부 유삼익의 대를 이은 아버지 유춘(柳瑃)과 유득공은 태어날 때부터 서얼 신분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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