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사상과 문학
- 최초 등록일
- 2011.10.06
- 최종 저작일
-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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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오늘날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남긴 조선후기 실학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연암은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지니고 있어 입신출세할 수도 있었지만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재야의 선비로 지내면서 당시 보수적인 양반사회에 맞서서 자신의 문학적, 사상적 진보성을 견지하고자 하였다. 연암은 자기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려고 성실하게 노력한 양심적인 작가요, 사상가라 할 수 있다. 그 중 연암의 소설은 연암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생각 그리고 이상을 함축적으로 모아놓았다고 할 수 있다. 본고는 연암의 소설 전반에 걸쳐있는 연암의 사상과 문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목차
1. 연암의 생애
2. 시대적 배경
ⅰ 정치적 상황
ⅱ 경제적 상황
3. 연암의 사상
ⅰ 반봉건적 사상 (양반사회 비판)
ⅱ 이용후생의 실학
4. 연암의 산문
① 양반전
② 호질
③ 허생전
5. 열하일기
ⅰ 열하일기의 내용
ⅱ 열하일기에서 주목할 특징
본문내용
오늘날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남긴 조선후기 실학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연암은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지니고 있어 입신출세할 수도 있었지만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재야의 선비로 지내면서 당시 보수적인 양반사회에 맞서서 자신의 문학적, 사상적 진보성을 견지하고자 하였다. 연암은 자기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려고 성실하게 노력한 양심적인 작가요, 사상가라 할 수 있다. 그 중 연암의 소설은 연암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생각 그리고 이상을 함축적으로 모아놓았다고 할 수 있다. 본고는 연암의 소설 전반에 걸쳐있는 연암의 사상과 문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연암의 생애
- 1737년(영조 13)∼1805년(순조 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또는 연상(煙湘).
-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출생하였다.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강하고 매우 영민하여 옛사람의 선침(扇枕)과 온피(溫被) 扇枕 : 베개에 부채질한다는 뜻으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지극한 효성(孝誠)을 말함. 溫被 : 이불을 따뜻하게 함. 또는 그 이불.
같은 일을 흉내 내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포의(布衣)로 지냈기 때문에 할아버지 필균에게서 양육되었다.
- 1752년(영조 28) 전주이씨 보천의 딸과 혼인하면서 《맹자》를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게 되었으며, 특히 보천의 아우 양천에게서는 사마천의 《史記》를 비롯하여 주로 역사서적을 교훈 받아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고 많은 논설을 습작하였다. 수년간의 학업에서 문장에 대한 이치를 터득하였으며, 처남 이재성과 더불어 평생의 문우로 지냄과 아울러 그의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다.
- 1755년 연암이 19세 때 처숙 이양천이 귀양에서 풀려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자 그의 정신적 방황은 시작되었다. 이 무렵부터 연암은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을 하는 데 아마 장래의 거취문제에 직면한 연암의 내면적 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장인과 처숙은 영조의 탕평책을 고식책이라하며 반대하였던 인물이다. 그들의 영향 속에서 성장한 연암은 국왕의 탕평책을 적극 추종한 일파들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점차 권문, 귀족화 되던 당시의 정치현실과 이에 따른 양반사회의 염량세태에 대해 자연 비판적인 견해를 품게되어, 번민을 거듭한 끝에 과거를 통한 입신출세의 길에 대해서도 점차 회의적으로 되어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우울증을 달래기 위해 문하의 겸인들을 불러 기이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며 이것은 후에 그의 소설의 소재로 많이 쓰이게 된다.
참고 자료
김혈조(2009), 『열하일기』, 돌베게.
최천집(2008), 『호질 창작의 연원과 배경』, 한국문학언어학회.
김정문(1990), 『허생전 연구』, 배달말학회, 배달말.
김종운(1998), 『청람어문학』,「연암소설에 나타난 실학사상 고찰」, 청람어문교육학회.
박기석, 『연암소설의 심층적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