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와 창덕궁 낙선재
- 최초 등록일
- 2011.11.07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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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양조경사 과목 수업중 과제로 가장 최근까지 낙선재에서 살다 돌아가신 덕혜옹주의 삶과 낙선재를 연관하여 작성한 레포트 입니다.
목차
Ⅰ. 서론
1. 연구 대상
2. 연구 배경
3. 연구 범위
4. 연구 목적
Ⅱ. 본론
1. 문헌조사
2. 논문
Ⅲ. 결론
본문내용
① 경향신문 (1996.9.17)
`누가 왕녀의 눈물을 보았는가`
89년 낙선재가 주인을 잃은 지 7년 후인 96년에 발행된 이 신문기사에서는 낙선재에서 살다 역사속으로 사라진 세 명의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세 여인은 바로 황제의 외동딸 덕혜옹주, 두 조국을 섬긴 영왕비 이방자 여사, 마지막 왕비 순정효황후윤비이며, 낙선재는 이 세 여인의 한과 눈물을 담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② 동아일보 (1982.7.6)
`낙선재의 안뜰`
이 기사에서 낙선재는 덕혜옹주와 이방자여사가 살며, 줄리아 여사가 살다가 떠난 곳이며, 이왕실의 맥을 잇는 곳이라며 낙선재를 소개하고 있다. 1832년에서 37년 사이에 지어진 낙선재는 본래 외로운 여인들을 위해 지어졌다고는 하지만, 입에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붕어한 왕의 대비를 위한 집이라 한다. 그 이전에는 왕이 죽은 후에도 대비가 대조전 등 궁궐의 본채에서 살았는데 이때 다른나라의 예를 따라 새왕이 본채를 차지하게 하기 위해 대비를 위한 본채를 지었다는 것이다. 또한,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 자리잡아 석복헌, 수강재와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어 50여개의 방과 정자회랑이 조촐하고 섬세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묘사되어 있다.
2) 논문
- 조선후기 풍수 노반척 적용 조영계획 :연경당, 낙선재, 운현궁, 선병국 가옥을 중심으로 (저자명: 강옥희)
조선 후기의 풍수에 관한 이 학위논문에서는 연경당, 낙선재, 운현궁, 선병국 가옥의 풍수를 중심으로 하며 낙선재에 관해서는 낙선재 일곽에 거주했던 왕족들의 역사와 풍수를 관련지어 글을 풀어나가고 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살펴보도록 하자.
헌종은 낙선재에서 천수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경빈 김씨에 대한 애정은 지속 되었는데, 경빈 김씨는 사저에 나갔다 하더라도 낙선재에 머무르면서 그 위상이 높았기 때문에 궁궐 내에서의 위치는 변함이 없었다. 또한, 낙선재는 왕세자 출산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헌종의 죽음으로 경빈 김씨는 낙선재에서 2년 간 생활 하였고, 그 후 1962년 덕혜옹주, 1963년 영친왕 이은, 이방자 여사도 1989년 이곳에서 운명하셨다. 세 사람 모두 이곳에서 여생을 마치게 되고 낙선재는 처음의 의도를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그 후 이곳을 차지한 사람들에겐 천수를 누리게 하는 공간으로서 그 의무를 다하였다고 한다.
참고 자료
창덕궁 낙선재, 조선 왕실의 마지막 안식처 연합이매진 박상현
창덕궁, 가슴까지 먹먹해지는 '마지막 황족'의 여운 해럴드 경제 뉴스 이고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