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 전개과정
- 최초 등록일
- 2011.11.14
- 최종 저작일
- 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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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감사합니다.
목차
※ 고구려의 건국과정
※ 고구려의 성장과 발전
※ 고구려의 전성기
※ 고구려의 문화
※ 고구려의 쇠퇴와 문화
※ 한국문화의 뿌리 - 고구려
본문내용
☞ 고구려, 어떻게 건국되었는가.
흔히들 고구려의 건국 하면, 해모수와 유화의 자제로 태어난 ‘고주몽’의 건국 신화를 들어봤을 것이다. 여기서도 건국신화를 배경으로 역사 자료를 참고하여 고구려는 어떻게 건국되었는가에 대해 알아보겠다.
고구려 건국의 시조는 ‘고주몽성제’이며 ‘열국시대’의 한 나라였던 북부여의 여섯 번째 단군인 고무서 단군의 딸인 ‘소서노’와 결혼하였다.
옛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시에는 그 유명한 광개토대왕릉비가 자리 잡고 있다. 그 비문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의 터전을 잡을 때 북부여로부터 나왔는데,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내려왔으니 태어나면서부터 신성함이 있었다. 수레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었다. 왕이 나루에 다다라 말하기를 ”나는 황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 유화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시키고 자라를 떠오르게 하라“고 하였더니,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자라가 떠돌라 건너갈 수 있었다. 비류곡 홀본(졸본) 서쪽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인간세상의 왕위에 있는 것을 즐기지 않으니 이로 말미암아 (하늘이) 황룡을 내려보내어 왕을 맞이하게 되니 홀본의 동쪽 언덕에서 황룡을 타고 올라갔다.”
비문에서 보듯이 고구려 사람들은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과 자신들이 북부여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다. 즉, 자신들은 남만주 지역에서 오래 전에 정착하여 발전해 온 것이 아닌 이주민이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주도세력 또한 부여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부여가 고구려보다 북쪽이라는 것을 볼 때 고구려의 주민 구성은 북방에서 말을 타던 무리들이 내려와 압록강 유역에 정착하면서 살던 사람들과 융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