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일제의 관동대지진 과 창씨개명에 대한 대학교레포트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일제의 관동대지진
Ⅲ. 소결론
Ⅳ. 창씨개명
Ⅴ.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머리말
923년 9월 일 우리는 이 날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일본인들에게 이 날은 진재의 날 즉, 관동대지진으로 도쿄, 요코하마 일대가 큰 피해를 본 날임을 일본인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일부 양심 있는 학자들은 이날을 조선 사람들이 학살되기도 했다고 말한다.) 오늘날에도 일본 정부는 이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이 행한 범죄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 반면에, 조선인 학살자에 대해서는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고 있다. 특히 조선인 학살 사건에 진상을 규명하는 조사 사업을 원천적으로 봉쇄했으며, 보상은 물론이고 희생자 ` 유가족에 대해 애도의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2)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조선인 대학살의 시발점은 바로 일제의 비상 계엄령 선포였다. 일제는 계엄선포의 수단으로 조선인들을 이용하였고, 그 다음으로는 일제의 치안유지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일본 정부의 입장에 대해 우리 정부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관동대지진 때 죽은 조선인을 조사한 이후, 정부 차원의 조사나 당국자의 관심표명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학계에서 역시 이와 같은 실정이다. 오히려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일본에서는 관동대지진에 관련한 출간된 서적이 60종 이상이고 그 논문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다. 또한 일반 사람들의 관심도 끊이지 않아 조선인들의 학살이 집중적으로 행해진 후나바시, 나라시노 등지에는 시민들의 연구모임까지 있고, 해마다 아라카와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시민단체의 주도로 관동대지진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 행사가 벌어지고 있다.3) 이처럼 아직도 잃어버린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 대학살에 대해 일본정부는 왜 그러한 만행을 자행하며,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Ⅱ. 일제의 관동대지진
923년 9월 일 정오 분 전에 일본 중심부 도쿄 일대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이 도쿄와 요코하마일대를 혼란에 빠뜨린 지진은 무려 강도 7.9였는데, 알려진 바에 의하면 관동지방에 20만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 하고, 0만명 이상의 사망자와 00억원 이상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고 한다. 또한 실제로 도쿄와 요코하마 지역에서는 지진 직후 화재가 발생하기도 하여 큰 피해가 있었다. 당시 많은 이재민들은 부모가 죽거나 가족과 헤어지고 집이 불타올라 잘 곳도 없는 상황이 였는데, 이들은 자연스럽게 무리를 이루어 식량을 요구하며 극도로 혼란을 일으켰다. 당시 내무대신 미즈로 렌타로,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 후미오, 경시총감 아카이케 아츠시 세 사람은 이 상황에 대하여 대책을 강구하였는데, 이들은 일찍이 내무성에 근무하며 98년 쌀 소동때 민중을 과잉 탄압했던 자들이였다.
참고 자료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 2천년 보이는 역사, 보이지 않는 역사(근현대)』, 경인문화사, 2006 5p
한일민족문제학회, 『재일 조선인 그들은 누구인가』, 삼인, 2000 27p
강덕상,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역사비평사, 2005 3p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 2천년 보이는 역사, 보이지 않는 역사(근현대)』, 경인문화사, 2006 55p
위의 책 56p
한일민족문제학회, 『재일 조선인 그들은 누구인가』, 삼인, 2000 20p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 2천년 보이는 역사, 보이지 않는 역사(근현대)』, 경인문화사, 2006 62
미즈노 나오키, 『창씨개명』, 산처럼, 2008 86~88
창씨개명 3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