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회담과 한미상호방위조약, 그리고 이승만의 재조명
- 최초 등록일
- 2011.11.19
- 최종 저작일
- 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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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난 후, 미국이 휴전회담을 진행하던 중
이승만 대통령이 이 휴전회담을 막은 이유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어떻게 체결되었는지에
관한 레포트입니다. 이승만을 재조명할 수 있습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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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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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중의 이승만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는데 이는 전시독재의 구체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이렇게 헌정파괴행위가 빚어지자 전시독재에 환멸을 느낀 미국은 급기야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이는 비록 도상작전으로 끝났지만 당시의 위기상황과 한미관계의 불평등한 측면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부산정치파동은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임시수도 부산의 국회에서 이승만의 재집권을 위해 통과시킨 최초의 헌정파괴행위였으며 전시독재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국회 내의 간선방식으로는 대통령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1951년 11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했으나 1952년 1월 18일의 표결에서 반대 143 대 찬성19로 간단하게 부결되었습니다. 반(反)이승만 세력이 다수였던 당시 국회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거스르면서까지 개헌을 단행하려 했습니다.
1952년 5월 대구의 육군참모총장실에 1개 사단을 부산에 파견하라는 이승만으로부터 긴급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국회에 군대를 동원해서 압력을 가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종찬총장은 미국의 압력도 있고 해서 파병을 거부했습니다. 이승만은 이종찬의 파병 거부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의 충복인 원용덕헌병사령관을 동원해 5월25일 0시를 기해 임시수도 부산을 포함한 영남과호남지방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또한 야당의원들을 국제공산당과 관련이 있다고 조작해 구속했습니다.
미 대사관의 라이트너 대리대사는 계엄령의 조기해제를 촉구하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5월30일 오후 3시 이승만에게 전달했습니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라이트너에게 “당신은 계엄령이 곧 해제될 것이라는 말을 당신 정부에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라이트너가 ‘곧’이라는 것이 2일정도냐 아니면 2주냐고 묻자 이승만은 “2분이 될 수도 있고 2개월이 될수도 있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렸습니다. 또한 이승만은 미국과 유엔한국부흥위원단(UNCURK)이 한국의 내정에 간섭한다고 화를 냈습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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