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한국 역사의 이해 수업에서 대원군의 생애와 업적, 고종과 명성황후와의 관계 그리고 의의에 대하여 작성한 레포트 입니다.
목차
1. 과제를 작성하기에 앞서
2. 조선의 마지막 촛불 흥선대원군
1) 상갓집의 개로 살다.
2) 흥선군, 대원군이 되다.
3) 1차 집권기(1) - 왕권강화의 꿈
4) 1차 집권기(2) - 척화론
5) 2,3차 집권기
3. 고종과 명성왕후
4. 끝마치며
5. 참고문헌
본문내용
2. 조선의 마지막 촛불 흥선대원군
1) 상갓집의 개로 살다.
우선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가계를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다. 그의 가계는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로부터 파생되고 있다. 사도세자가 혜빈 홍씨에게서 얻은 아들이 정조이며 궁녀에게서 얻은 세 아들 중 둘째아들이 은신군이었다. 그런데 은신군은 자기 밑으로 후사가 한 명도 없어 인조의 셋째아들인 인평대군의 5대손을 양자로 삼았는데 그가 바로 이하응의 아버지인 남연군이다.
이하응은 혈통 상으로 왕계에 속한 인물이었으나, 그가 자라온 삶은 왕족의 삶과는 아주 달랐다. 열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열일곱 살이 되어 아버지인 남연군까지 여읜 그는 의지할 곳 한 데 없이 불안한 나날을 보낸다.
대원군이 살던 19세기 중반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로, 그들은 한 나라의 임금의 안위를 좌지우지 할 정도였다. 특히나 그들은 왕족과 그 종친들에게까지도 통제와 압력을 가했기에, 그는 움츠러든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하응은 건달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며 안동김씨의 결혼식이나 상갓집에 찾아가 술이나 밥을 얻어먹으며 파락호 행세를 하였다. 때문에 그를 무시하던 사람들은 이하응을 가리켜 ‘상갓집 개’, ‘궁도령’이라는 별명을 붙여 무시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하응이 건달들과 무리 지으며 다녔다고 하여 그를 꿈 없고 재능도 없는 사람이었다고 표현한다면 옳지 않다. 대원군이 되기 전 추사 김정희로부터 그의 예술성에 대해 칭찬한 바가 알려져 있고 관직에도 올랐으며 그가 직접 쓴 저서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대원군이 되는 44세 이전에는 자신의 큰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왕손 가운데서도 방계혈족일 뿐이었던 그가 권력의 정점까지 어떻게 도달할 수 있었을까?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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