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사료에 나타나는 어부 안용복 활동과 업적 및 의의와 시사점 [한국 역사의 이해]
- 최초 등록일
- 2011.12.04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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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역사의 이해 수업에서 작성한 레포트 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사료를 바탕으로 (그림 첨부) 보여지는 안용복 울릉도와 독도를 지킨 그의 활동 및 업적 그리고 의의와 시사점 작성한 레포트입니다.
돈이 아깝지 않을 겁니다.
목차
1. 과제를 작성하기에 앞서
2. 안용복 그는 누구인가?
3. 안용복의 울릉도 독도 지키기
4. 일본사료에 나타나는 안용복
5. 끝 맺으면서 하는 말
6.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본문내용
안용복(安龍福)은 생몰년이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조선 숙종 때,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인 것을 일본막부가 자인하도록 활약한 민간 외교가이자 어부이다. 그는 동래부 출신으로 홀어머니 아래에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여야 한다는 엄한 가훈을 받고 자랐다. 일찍이 동래수군으로 들어가 능로군(能櫓軍)으로 복무, 부산의 왜관(倭館)에 자주 출입하여 일본말을 잘하였다.
1693년(숙종 19) 동래어민 40여명과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고기를 잡기 위하여 침입한 일본어민을 힐책하다가 부하 박어둔(朴於屯)과 함께 일본으로 잡혀갔다. 이 때 호키주(百耆州)태수와 에도막부에게 울릉도가 우리 땅임을 주장하고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쌀의 두량(斗量)과 베의 척(尺)을 속이는 등 중간에 농락이 심한 것 등을 밝히고,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받았다. 하지만 가지고 오는 도중에 나가사키(長崎)에서 대마 도주에게 그 서계를 빼앗겼다. 대마도주는 울릉도를 차지할 계획으로 다케시마(竹島)문서를 위조하여 같은 해 9월 차왜(差倭)를 동래에 보내어 안용복을 송환하는 동시에 예조에 서계를 보내어 조선의 어민이 일본영토인 다케시마에서 고기 잡는 것을 금지시켜달라고 요청하였다.
접위관(接慰官) 홍중하(洪重夏)가 하직 인사를 하고, 좌의정(左議政) 목내선(睦來善), 우의정(右議政) 민암(閔黯)이 홍중하와 함께 청대(靑對)하였다. 홍중하가 아뢰기를, “왜인(倭人)들이 이야기하는 이른바 죽도(竹島, 다케시마)는 바로 우리나라의 울릉도(鬱陵島)입니다. (중략)목내선, 민암은 아뢰기를, “왜인들이 민호(民戶)를 옮겨서 들어갔는지의 여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이곳은 300년 동안 비워서 버려둔 땅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흔단(釁端:불화의 발단)을 일으키고 우호(友好)를 상실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민암 등의 말을 따랐다.
-『숙종실록』권 25, 숙종 19년(1693) 11월조
폐방(弊邦;조선)에서 어민을 금지·단속하여 외양(外樣)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으니 비록 우리나라(조선)의 울릉도일지라도 아득히 멀리 있는 이유로 마음대로 왕래하지 못하게 했는데, 하물며 그 바깥의 섬으로 나가게 했겠습니까? 지금 이 어선이 감히 귀경의 죽도에 들어가서 번거롭게 거느려 보래도록 하고 멀리서 서신으로 알리게 되었으니, 이웃나라와 교제하는 정의(情誼)를 실로 기쁘게 느끼는 바입니다. (후략)
-『숙종실록』권 26, 숙종 20년(1694) 2월조
참고 자료
이상태,『사료가 증명하는 독도는 우리땅』, 경세원, 2007.
호사카 유지,『우리 역사 독도』, 책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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