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금동대향로
- 최초 등록일
- 2011.12.21
- 최종 저작일
- 2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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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내가 금동대향로로 결정한 것은 우리나라의 금속 공예품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는 신라의 금관이 꼽혀 왔는데 금동대향로가 출토됨으로써 신라 금관의 확고부동한 지위는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금동대향로가 1,300여 년의 잠에서 깨어난 순간 우리나라는 또 하나의 세계적 수준의 금속 공예품을 갖게 된 것이다.
목차
Ⅰ. 서론
Ⅱ. 백제금동대향로
ⅰ. 제작시기
ⅱ. 백제금동대향로의 가치
Ⅲ. 백제금동대향로의 각 부분
ⅰ. 뚜껑
ⅱ. 몸체
ⅲ. 대좌
Ⅳ. 결론
※ 참고문헌 ※
본문내용
Ⅱ. 백제금동대향로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라고도 불리는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 근처에 위치한 절터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바닥 진흙 속에서 거의 녹도 슬지 않은 원형 그대로 발견되어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일본 학계를 흥분시켰다. 그리고 국보 제287호로 1996년 5월 30일에 지정되어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한 마리의 큰 용이 용틀임을 하는 형상으로 몸통을 받들고 있는데 몸통은 갓 피어나려는 연꽃봉오리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꼭대기에는 봉황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편 채 서 있다. 향로의 모습은 높이 62.5cm, 몸통 최대지름 19cm, 무게 11.8kg이며, 용과 봉황의 비중이 상당히 두드러져 있다. 전체적인 형태로 볼 때 크게 뚜껑부, 몸체, 다리부분으로 별주 되어 하나로 만들어졌다.
ⅰ. 제작시기
금동대향로의 제작 시기는 무왕이 다스리던 7세기 초라는 발표가 있었으나 6세기 후반이라는 의견도 있다. 우선 7세기 초라는 의견은 백제대향로를 불교 계통의 유물로 단정하고 무왕 때의 왕성한 불교 사업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리고 6세기 후반의 경우는 유적지의 목탑지에서 발굴된 사리감의 명문을 근거로 둔 것이다. 하지만 금동대향로의 양식을 보자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북위향로의 삼산형 산악도 그리고 가운데의 유운문 등 의 양식은 북위가 멸망한 534년 즘에는 퇴락하거나 변질 되었다. 그렇다면 북위향로의 양식과 비슷한 금동대향로가 양식적 요소가 파괴된 뒤에 그것들을 재현해 만들었다는 것은 아이러니 하다. 북위향로의 양식들이 성행하던 시기를 조사하면 금동대향로의 제작 시기는 대략 520년대 후반에서 534년 사이일거라는 것이 양식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추측할 수 있는 시기이다.
ⅱ. 백제금동대향로의 가치
금동대향로는 그냥 보아도 미적으로 훌륭한 작품이다. 제작시기부터 1400여년이나 지난 지금 보아도 그 미적 가치는 상당하다. 하지만 금동대향로의 가장 대표되는 미는 균형미다. 밑의 용 부분을 보면 용이 한쪽 다리를 들고 있다. 한쪽 다리를 들어줌으로 좌우의 균형을 맞추었고 향로 본채와 뚜껑부분의 비래또한 안정감 있는 타원형으로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
참고 자료
인터넷 게시판 『TISTORY』http://www.tistory.com/, http://aube.tistory.com/454
『백제금동대향로와 창왕명석조사리감 』. 국립부여박물관
『백제금동대향로에 나타난 복식에 관한 연구』 2004, 김기엽
『한국사시민강좌』 제23집, 1998, 최병헌, 일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