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외교의 관점에서 본 광해군( 신하vs 광해군 관점으로)
- 최초 등록일
- 2011.12.23
- 최종 저작일
- 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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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치 외교 관점으로 본 광해군입니다.
관료지배주의로 팽배한 조선 시대에서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보았습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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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광해군은 현대로 들어서면서 재조명 받는 조선의 왕이다. 많은 문헌과 학계에서 조선왕조에서 평가한 광해군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 당시 명과는 계속해서 사대관계 맺고 있던 조선이 그들의 파병 요구를 거절하고 회피하며, 명과 반대 입장에 있던 후금과의 화친적인 교류를 했다. 이는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와 같이 광해군은 이 두 나라의 속에서의 중립적인 외교를 통해 조선의 위치를 잡으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임진왜란 직후 대동법을 실시하고 소실되었던 서책을 간행하는 등, 폐허가 된 조선을 재건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던 왕이기도 하였다. 이 같이 광해군이 정치적 지도자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음에도 그는 재위 16년 만에 인조반정으로 폐위 된다. 왜 그는 폐위될 수 밖에 없었을까? 답은 조선에 팽배했던 관료 지배주의적 문화에 있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조선의 관료 지배주의적 문화가 광해군의 외교정치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으며, 그를 어떻게 폐위로 이끌었는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광해군의 리더십에도 문제점은 없었는지 점검할 것이다.
광해군 재위 시절은 명, 청 교체기라고 칭해지는 시기이다. 누르하치가 광해군 8년에 국호를 후금이라 칭하고 제위에 올랐다. 그 후 2년 뒤 누르하치는 명에 대한 전투행위를 개시하였다. 동시에 누르하치는 계속해서 조선에 후금과 조선은 원한이 없으니 파병하지 말라는 문서를 계속해서 보내왔다. 이에 반해 장차 후금의 대군이 올 것을 직감한 명나라는 후금을 칠 터이니 조선의 병사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보내왔다. 이와 같은 명의 계속되는 파병요청과 후금의 동병하지 말라는 요청을 둘 다 듣고 있던 조선은 매우 곤란함을 겪고 있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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