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정화의 남해 대원정
- 최초 등록일
- 2002.10.31
- 최종 저작일
- 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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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음...
목차
*서론
*본론
Ⅰ.원정의 배경
Ⅱ.정화
Ⅲ.원정의 경과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중국의 역대 왕조 중에서 명왕조 만큼 황제 독재 권력이 강했던 시기는 없었다. 명대에는 승상직이 폐지되어 6부의 상서가 황제에 직속되었다. 각 성의 대신은 있으나 총리대신이 없는 상태로 황제가 총리대신을 겸하고 있던 셈이다. 또 각 군단의 지휘관은 있으나 군을 통괄하는 총지휘관직이 없으니, 황제가 직접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황제 개인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에 그는 만능이어야 했다. 그런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황제의 손발이 되어 일을 하는 측근이 필요하였는데, 그런 면에서 환관이 정치의 핵심부로 스며들게 되었다. 환관은 자식을 낳을 수 없기 때문에 사리를 꾀하지 않을 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명을 건국한 명태조는 한·당의 역사적 교훈에 따라 환관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엄중하게 금하였다. 궁중에 철패를 걸어 놓고, 환관으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자는 베어 버린다고 명기해 두었다. 명왕조는 이 창시자의 유훈을 준수해야 했고, 태조의 뒤를 이은 건문제는 이것을 엄격하게 지켰으므로 환관은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연왕에 봉해져 북경에 있던 태조의 넷째 아들인 영락제는 정난의 변을 통해 황제가 된다. 그가 정난의 변을 통해 황제가 되었던 것은 환관들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환관의 협력을 얻어 제위에 오른 영락제는 철칙이나 조법을 무시하고 환관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제위에 오른 그는 자신의 본거지인 북경으로 천도하였다.
참고 자료
參考文獻
〈단행본〉
傅樂成,『中國通史-下』,서울: 知永社.1998
李春植,『中國史 序說』,서울: 敎保文庫.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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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吳一煥,『鄭和의 航海와 東南亞華僑社會의 形成에 미친 影響』 경희대학교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