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근대사 - 강희대제 레쥼
- 최초 등록일
- 2012.02.02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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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목차
Ⅰ. 서 언
Ⅱ. 강희제 즉위
1. 강희제 탄생 및 즉위
2. 오배의 난
Ⅲ. 삼번의 난
Ⅳ. 외교 정치
1. 러시아
1) 러시아의 침략
2) 강희제의 대응
3) 네르친스크 조약
2. 대만
3. 몽골 및 티베트
Ⅴ. 내 정
1. 황무지 개간
2. 인두세 정액화와 성세자생정(盛世慈生丁)
3. 상인 구휼 정책
4. 조운(漕運) 정비와 6번의 순행
Ⅵ. 사상
1. 이학치국(理學治國)
1) 유학 중시
2) 과거 제도
3) 문자의 옥
2. 이교도 존중 및 국가존엄 중시
Ⅶ. 결 언
본문내용
중국 청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1661∼1722) 강희제(1654.~1722.12.20)는 중국 역대 황제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황제이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자 명군, 즉 천고일제(千古一帝), 천 년에 한 번 나올 만한 황제) 또는 연호를 따서 강희대제(康熙大帝)로 칭송받으며 아직도 많은 중국인에게 크게 존경받는다. 그는 평생 하루에 300~500통이 넘는 보고를 모두 보고 처리하였다고 한다.
8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즉위한 황제이며 14세 때 친정을 시작하였다. 즉위 초에는 어린 나이로 인해 병부상서 오배 등의 네 명의 보정대신들에게 국정을 일임하였다. 만주족의 예법에 따라 1667년(강희 6년), 14세에 친정을 시작하였으며 2년 뒤에 발생한 오배의 난을 평정하여 실질적으로 조정을 장악하였다.
청조의 중앙집권에 가장 큰 방해세력이었던 삼번의 평정과 대만정벌로 중국 전역은 청조의 실질적인 통치하에 들어가서 중국지배가 안정된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강희제로부터 시작된 안정된 중국지배와 대외적인 영토의 확장은 그 뒤의 옹정제(1722~1735), 건륭제(1735~1795)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고, 3대의 130여 년간은 ‘태평성대’라는 호칭을 가지며 ‘강건성세’ 강건성세(康乾盛世) 또는 강옹건성세(康雍乾盛世)라 한다. 청나라의 최전성기로 제4대 황제 강희제가 삼번의 난을 평정한 1681년부터 시작하여 제5대 황제 옹정제를 거치고 제6대 황제 건륭제 치세의 중반부가지를 말한다. 강건성세의 ‘강’과 ‘건’은 강희제와 건륭제의 앞 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라 불리기도 한다.
그는 평생 배움에 뜻을 두어 학식 역시 뛰어났다. 명나라의 역사서인 《명사》를 편찬하여 명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하였으며, 오배와 오삼계 등의 내부의 반대자를 처단하고 황제권을 강화하여 자신의 오랜 재위 기간 동안 신하들이 함부로 넘보지 못할 절대 황제권을 확립하였다. 또한 유학을 중시했으며 이교도를 존중하며 선교사에게 서학을 배웠다. 하지만 도덕과 종교에서는 중국 황제의 전통권위체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강희제는 검소한 황제로 유명한데, 명나라 시기 무려 10만명이 넘던 환관과 궁녀를 고작 400명만 남겨주고 그 예산을 40분의 1로 줄였다. 또한 옷이 찢어지지 않는 한 최대한 개워 입었고, 흉년이 들면 지체없이 세금을 감세하였다. 또한 강남을 자주 순회하여 여러 지주들의 지지를 얻었고, 예산을 초과하게 되면 내탕금을 활용해서 백성들이 돈을 지불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또한 1710년에는 인두세를 폐지하여 서민의 조세 부담을 격감시키는 정책을 성세자생(盛世慈生)을 시행하였다.
강희제의 좌우명은 `국궁진력(鞠躬盡力)`으로 `섬기는 마음으로 몸을 낮추어 온힘을 다한다.`라는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한 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 순간을 부지런하지 않으면 천대, 백대에 우환거리를 남긴다."
"모든 비용은 백성들의 피땀으로 얻어진 것이니
주인 된 황제로서 절제하고 절제함은 당연한 것이다."
-강희제 《근검록》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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