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의_익산_경영과_왕궁리_유적
- 최초 등록일
- 2012.03.23
- 최종 저작일
- 2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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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말 자세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잘 할용하세요!!
목차
Ⅰ.머리말
Ⅱ.익산의 역사지리적 위치
Ⅲ.무왕대의 정치상황
Ⅳ.무왕의 익산경영과 익산 왕궁리 유적
Ⅴ.익산 왕궁리 유적의 의의
Ⅵ.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1989년부터 익산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이후 놀라운 사실들이 하나 둘씩 발견되었다. 그 중 가장 첫 번째로는 익산에서 왕궁터가 발견되고 익산에 왕궁이 세워졌을지 모르는 증거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익산 왕궁리 유적 주변에 미륵사와 제석사지, 그리고 근처에 토성 등 왕궁성의 특징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었다.
왕궁터는 고대 나라들의 수도에서 많이 발견되곤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왕궁터가 익산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현재의 서울), 웅진(현재의 공주), 사비(현재의 부여)말고 익산에도 다른 또 하나의 왕궁이 세워졌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왕궁성의 발견이 주목받는 것은 왕이 그 곳에 기거하며 정사를 돌보았다는 곳을 의미하며 이는 고대 왕궁성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통해 보면 익산이 백제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한편 발굴을 통해 이 왕궁터는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시기까지 존속되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이는 백제 무왕시기와 의자왕시기, 그리고 태종무열왕시기까지 존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백제 무왕통치 시기에 익산에 이러한 유적들이 세워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백제 무왕이라 함은 성왕 이후 쓰러져 가던 백제를 일으킨 왕으로써 백제에서 근초고왕 다음으로 손꼽히는 왕으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그 시기 무왕에게 익산은 어떠한 의미를 지닌 곳이기에 무왕은 익산을 중시하게 되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또한 익산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에 무왕은 익산을 경영하게 되었던 것이며 익산에 미륵사지와 제석사지, 그리고 왕궁리 유적과 같은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일까? 라는 의문도 생기게 된다. 또한 다른 하나의 가능성이나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까지 생각할 정도였다면 익산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익산이 이렇듯 주목하였던 것은 비단 무왕뿐만이 아니었다. 익산에서 출토되었던 많은 유물들을 보건대 예로부터 익산은 중요한 지역이었다. 익산이 왜 이렇게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많이 등장하고 중요시되었던 것일까. 또한 무왕은 왜 익산을 중요시하였던 것일까. 이에 대하여 무왕의 익산의 경영이 이루어지기 전 역사지리적 위치에서 익산에 대하여 알아보고 익산은 백제에서 어떠한 역할을 점하고 있었으며 무왕의 익산경영에 대한 증거인 익산 왕궁리 유적은 우리 역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를 알아보고 정리하고자 한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무왕의 익산경영과 함께 미륵사를 다루었다. 나는 무왕의 익산경영을 통해 익산 왕궁리 유적이 우리의 역사흐름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며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참고 자료
유원재, 1998,「백제 무왕의 익산 경영」
노중국, 2003,「백제사상의 무왕」
이병호, 2010,「익산지역 고대 정치제와 백제의 경영」, 호남문화포럼발표
박현숙, 2008,「백제 무왕의 익산 경영과 미륵사」, 『한국사학보 제 36호』
나종우, 「백제사상에 있어서 익산의 위치」
이도학, 2005,「백제 무왕의 계보와 집권기반」, 『백제문화 제 4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