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Ⅱ. 황룡사 1. 황룡사의 소개와 가람배치2. 황룡사의 창건 배경 3. 황룡사의 역사 4. 주요 문화재Ⅲ. 분황사 1.분황사의 소개와 가람배치 2. 분황사의 창건 배경 3. 분황사의 역사 4. 주요 문화재 Ⅳ. 나오며I. 들어가며『삼국유사』에 기록되기를, 과거 신라시대 경주에는 절들이 별처럼 늘어서 있고, 탑들이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많았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절들 중 황룡사와 분황사는 신라 중고기에 지어진 대표적인 사찰이며 역대 국왕의 거동이 잦은 국가적인 사찰이었다. 신라에서 두 번째로 지어진 불교국가 초기의 사찰인 황룡사와 불교가 크게 중흥했던 전성기에 지어진 분황사는 그 창건 시기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정치적 배경에는 상당한 유사점이 발견된다. 본 보고서에서는 황룡사와 분황사를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그 창건 배경에 대하여 정치적 이유와 관련해서 살펴 볼 것이며, 시기에 따른 가람의 배치양식이나 규모의 변화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며 두 사찰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Ⅱ. 황룡사 1. 황룡사의 소개와 가람배치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에 창건되었다. 당시 신라가 잦은 대외간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에 이어 또 다시 황룡사를 지은 것은 불교가 새로운 국가이념이며 정신적 지주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후 불교가 대중적인 뿌리를 내리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는 것에 더 나아가 삼국통일을 위한 또 다른 사찰 상징물을 위해서도 건립한 것이 황룡사이다. 법흥왕은 흥륜사를 세워 불교 부흥을 기원하였고, 진흥왕은 황룡사를 세워 국가 발전에 대한 기원과 왕권의 신장을 이룩했다.황룡사지는 발굴조사 결과 가람 규모와 배치의 변화가 세 번이 있었는데 창건 당시의 1차 가람은 중문과 남회랑, 동,서회랑을 놓아 백제의 일탑일금당 형식이었다. 574년에는 높이가 1장 6척(약 480cm) 되는 장륙불상을 조성하면서 큰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그 이후 금당을 새로 크게 고쳐지었다. 이는 2차 가람으로 내부를 구획하던 회랑이 사라지고 중문을 창건하여 가람의 남쪽에 설치하였다. 또한 그 북쪽에 목탑, 중금당, 강당을 남, 북 일직선상에 배치하였고 중금당의 동, 서쪽에 동, 서금당을 남향으로 배치한 일탑삼금당의 배치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645(선덕여왕 14)년에는 자장율사의 청으로 새로 9층의 목탑을 짓는 등 그 이후에도 수리와 중건이 계속되었다. 황룡사의 남쪽에서부터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중심선상에 자리잡고, 중금당 좌,우에 각각 회랑을 갖춘 동,서 금당이 위치한 일탑삼금당의 독특한 가람 배치가 이루어진다. 현재 각 건물들의 초석이 잘 남아 있어서 남쪽으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자리를 볼 수 있으며 초석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쳐 세 개의 금당과 목탑, 중문을 중심으로 경루와 종루, 승방, 회랑 등의 부속 건물들이 갖추어져 있는, 지금 황룡사 터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 이루어졌다.덧붙여 황룡사는 동으로는 명활산, 서쪽으로 선도산, 북으로는 소금강산, 남으로는 경주 남산이 교차되는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산속에 위치하고 있는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위치함으로써 아늑한 느낌을 덜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가람 배치를 남문 3칸, 중문 5칸, 목탑 7칸, 금당 9칸, 강당 11칸으로 점차 칸수를 늘려 절 안으로 들어갈수록 부처님의 넓은 세계로 들어서는 느낌이 들도록 만들었다. 또한 황룡사 일대가 원래 연못었으며 이를 메워서 건축되었음이 발굴조사 결과 밝혀졌다. 김남용(2005), 『국보와 보물이 있는 옛 절터 이야기』, 일진사, pp158-160목차
없음본문내용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에 창건되었다. 당시 신라가 잦은 대외간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에 이어 또 다시 황룡사를 지은 것은 불교가 새로운 국가이념이며 정신적 지주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후 불교가 대중적인 뿌리를 내리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는 것에 더 나아가 삼국통일을 위한 또 다른 사찰 상징물을 위해서도 건립한 것이 황룡사이다. 법흥왕은 흥륜사를 세워 불교 부흥을 기원하였고, 진흥왕은 황룡사를 세워 국가 발전에 대한 기원과 왕권의 신장을 이룩했다.< 그림 1. 황룡사의 배치도 >
황룡사지는 발굴조사 결과 가람 규모와 배치의 변화가 세 번이 있었는데 창건 당시의 1차 가람은 중문과 남회랑, 동,서회랑을 놓아 백제의 일탑일금당 형식이었다. 574년에는 높이가 1장 6척(약 480cm) 되는 장륙불상을 조성하면서 큰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그 이후 금당을 새로 크게 고쳐지었다. 이는 2차 가람으로 내부를 구획하던 회랑이 사라지고 중문을 창건하여 가람의 남쪽에 설치하였다. 또한 그 북쪽에 목탑, 중금당, 강당을 남, 북 일직선상에 배치하였고 중금당의 동, 서쪽에 동, 서금당을 남향으로 배치한 일탑삼금당의 배치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645(선덕여왕 14)년에는 자장율사의 청으로 새로 9층의 목탑을 짓는 등 그 이후에도 수리와 중건이 계속되었다. 황룡사의 남쪽에서부터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중심선상에 자리잡고, 중금당 좌,우에 각각 회랑을 갖춘 동,서 금당이 위치한 일탑삼금당의 독특한 가람 배치가 이루어진다. 현재 각 건물들의 초석이 잘 남아 있어서 남쪽으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자리를 볼 수 있으며 초석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쳐 세 개의 금당과 목탑, 중문을 중심으로 경루와 종루, 승방, 회랑 등의 부속 건물들이 갖추어져 있는, 지금 황룡사 터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 이루어졌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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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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