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성당시기 산수전원시파 맹호연
- 최초 등록일
- 2012.04.19
- 최종 저작일
- 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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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 성당시기 산수전원시파를 대표하는 맹호연의 생애와
그의 대표작에 대한 리포트입니다.
목차
1. 맹호연의 생애
2. 맹호연의 작품
3. 맹호연시의 형식
4. 맹호연시의 위상
본문내용
맹호연은 무후武后 영창 원년永昌元年 양양1)에서 태어나 현종 개원 28년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맹호연이 시인으로서 지닌 높은 명성에 비하여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그의 생애에 관한 정보는 매우 미흡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일생동안 이렇다 할 벼슬의 경력 없이 포의지사로 지냈던 그의 이력에서 비롯된다. 또 그의 가문적 배경 또한 미약한 상태이다. 또 맹호연 자신의 창작태도가 자신이 창작한 작품을 알뜰히 간수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리고 유랑한 기간 또한 많아서 그 과정에서 산일된 작품의 수도 상당하다고 한다.
맹호연은 36,7세 이전에 주로 고향에서 독서와 은거로 생활했다. 구당서2)에 ‘녹문산3)에 은거하여 시로써 자적했다.’ 라는 기록이 있다. 그는 비록 은거생활을 하였지만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적막한 나날을 지내는 고독한 인사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지방의 관리를 포함한 유력한 인사들과 긴밀한 교유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맹호연의 첫 여행은 그의 나이 36,7세 무렵인 것으로 확인된다. 행선지는 낙양이다. 그 당시 맹호연은 진사시에 급제하고자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였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 갈 때는 유력자의 추천을 얻어 벼슬길에 오르리라는 희망과 그것의 좌절로 인한 실망으로 꽤 복잡했다. 후에 맹호연은 12세 연하인 이백4)과 교유를 맺었다. 그 외에도 왕유5) 장구령6) 등 여러 문인들과 교우관계를 맺는다. 이 중 왕유는 그와 친분이 두터웠는데 성당산수전원시파의 다른 이름들 중 왕맹시파라는 이름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들 두 사람은 성당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40세에 진사시에 응시하지만 실패한다. 그 실패는 맹호연에게 커다란 타격이었고 그로 하여금 출사의 문제에 대하여 심각히 회의하도록 하였다. 이런 회의는 그를 적극적인 입세로부터 소극적 은일의 길로 인도하였다. 후에 맹호연은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산수의 아름다움을 찾아 나섰고 당대 최고의 산수시인이라는 문학사적 명성과 어울리게 많은 산수시를 써냈다. 이러한 맹호연의 삶의 방식을 은거로 규정짓지는 힘들지만 그가 전원회귀의 희망을 여러 차례 언급한 점이나 비교적 빨리 찾아온 죽음 탓에 후에 삶을 은거시기로 다루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