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월하독작
- 최초 등록일
- 2012.04.21
- 최종 저작일
- 2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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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백은 〈월하독작〉이라는 제목으로 모두 4수의 시를 지었는데, 위의 시는 제1수이다. 제목은 `달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라는 뜻으로, 시의 형식은 오언고시(五言古詩)이다. 봄밤에 달과 그림자를 벗삼아 술을 마시는 시인은 낭만적 정취에 젖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기(知己)를 만나지 못하여 홀로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외로움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아득한 은하(銀河)에서 다시 만남을 기약하는 바람에서는 초탈을 구하는 마음이 읽혀진다. 첫구의 `화간일호주(花間一壺酒)`는 `화하일호주(花下一壺酒)` 또는 `화전일호주(花前一壺酒)`라고도 한다.
이백의 생애와 사상
이백은 당대 흥성기 시단의 대표적 시인일 뿐만 아니라 중국 문학사에서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으로 불리우고 있다. 이상에 대한 열망이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낭만주의적 예술 수법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통일체를 이룬 그의 시가는 굴원 이후 낭만주의 시가의 가계보에서 최고봉을 이룩하였다.
이백(701-762)은 자를 태백(太白)이라고 불렀으며, 호를 청련거사(靑蓮居士)라고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대상인일 가능성이 높은데 사회적 지위는 낮다고 할 망정 가정 생활은 매우 부유하였다. 유년 시절에 그는 유가의 경전을 학습하였을 뿐 아니라 백가의 학설을 배우고 검술을 닦았으며 신선도 찾아다녔다고 한다. 또 어려서부터 시적 재주를 보였는가 하면 호협한 남아의 기백도 나타냈다고 한다. 20세 때부터 사천의 명승 고적을 유람하면서 거기에 정을 붙이고 고향의 산천을 찬송하는 수많은 시를 창작하였다. 시인은 천보 3년(744년에 장안을 떠나 방랑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낙양에서 두보를 만나고 변주에서 고적을 만난 이백은 그들과 더불어 양원(梁園,개봉),제남 등 지역을 즐겁게 유람하였다. 그는 두보와 깊은 우정을 맺게 되었다. 두보와 이별한 후 이백은 강소, 절강, 하북, 산서, 산동, 하남 등지를 다니며 방랑 생활을 계속하였다. 10년 방랑 생활 가운데 하남에 머물러 있던 시간이 가장 길다. 그 사이 이백은 경제가 몹시 어려워 생활이 곤궁에 빠졌으며 세인들의 시기를 받았다. 자기의 뜻을 펴지 못하게 되자 두보처럼 인민에 접근한 것이 아니라 만취하여 도술을 담론하면서 산수에 정을 붙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감을 잃지 않고 낙관적이었으며 이상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에 대한 어지러운 현실의 야유와 조소는 그로 하여금 봉건 사회의 인정 세태를 저주하게 만들었고 날이 갈수록 더욱 불만스런 뜻을 갖게 하였다. 천보년간에 정치가 더욱더 어두워지자 그의 반항정신은 한층 더 노골화되었으며 암흑같은 현실의 죄악을 폭로하는 작품도 점차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백의 일생은 다사 다난한 일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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