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강택민
- 최초 등록일
- 2012.05.07
- 최종 저작일
- 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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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공산당 입당
2. 모택동의 중국에서
3. 등소평의 행동대장
4. 상하이에서 뜻을 펼치다
5. 천안문 사태
6. 공존과 평화의 대화합
7. 장쩌민의 측근들
8. 개혁의 완성
9. 등소평과의 작별
10. 장쩌민의 주장과 목표
11. 장쩌민은 최고의 수혜자
Ⅲ. 결 론
※參考文獻※
본문내용
장쩌민(江澤民)은 마오쩌둥(毛澤東)과 같은 뛰어난 통찰력은 지닌 한 국가의 건국자도 덩샤오핑(鄧小平)과 같은 과감한 사회 개혁가도 아니라고들 한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은 중국을 변화시켰지만 장쩌민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혹자들은 그가 준 영향은 우연이었던 것만큼이나 대단치 못하다고 평가한다. 그는 사회안정을 유지하면서 운 좋게 만난 경제성장의 시기의 행운을 향유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억측에 가까운 주장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장쩌민이 중국을 변화시킨 거물 중 하나라는 평가를 내리고 싶다. 이제부터 그의 인간으로써, 정치인으로써, 그리고 한 국가의 최고지도자로써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다.
<중 략>
5. 천안문 사태
덩은 죽을 때까지 권력에 집착했던 마오를 닮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덩은 적당한 때가 되면 이른바 ‘3세대’ 지도부의 ‘핵심`에게 권력을 넘기려 했다. 1984년 후야오방과 자오즈양이 각각 총서기와 총리에 지명되었을 때, 덩은 두 젊은 지도자가 “하늘이 무너져도”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덩은 이미 인플레이션과 서양의 영향이 만연하도록 방치한 이유를 들어 어쩔 수 없이 후를 축출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경제적인 혼란 때문에 이젠 자오도 몰아 내야 할 상황에 처했다.
덩은 심사숙고한 후 마지막 후계자를 선택했다. 후계자는 덩이 은퇴할 때까지 함께 개혁을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려면 그 사람은 후와 자오를 실각시킨 자유주의의 방만한 물결에 더 확고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만 했다. 동시에 이 사람은 후와 자오처럼 경제개혁에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만 했다. 신임 총서기는 정치적 보수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결합체면서, 중앙정부나 당 부처의 누군가로 강경 진압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은 사람이거나, 지역의 지도자로 학생 시위를 부드럽게 다룬 사람일 것이다. 덩은 중국의 차기 당 총서기로 장쩌민을 선택했다.
왜 장이었을까? 장은 반대파를 다룰 때 덩이 원하는 정치적 수완을 갖고 있었다. 장은 원칙적 측면에서는 확고했다. 또 장은 1986년과 1989년의 샹하이 학생운동을 다룰 때도 온건한 대응을 시도한 사람이었다. 장이 1980년대 초반 이후 당내에서 맺은 넓은 인간관계도 효과를 발휘했다. 많은 사람들과의 친밀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장은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았다.
참고 자료
김정계, 《중국의 권력구조와 파워엘리트》 , 서울, 평민사, 1994.
김정계, 《중국정치론》 , 서울, 평민사, 1997.
서진영,《현대중국정치론》 , 서울,나남,1997.
로버트 로렌스 쿤, 《중국을 변화시킨 거인 장쩌민》 , 서울, 랜덤하우스중앙, 2005.
브루스 질리, 《장쩌민 Tiger on the brink : Jiang Zemin and China`s new elite》 , 서울, 한국경제신문사, 2002.
가오신, 《21세기 중국을 움직이는 최고 권력자들》 , 서울, 창해,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