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500년 서울 『개경의 생활사』를 읽고
- 최초 등록일
- 2012.05.24
- 최종 저작일
- 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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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나서
본문내용
개성의 지형을 보면, 북쪽으로 송악산이 있고 그로부터 나온 산줄기가 청룡과 백호를 구성하고 있다. 풍수설에 딱 들어맞는 곳이라고 했다. 바다가 가까워 무역을 하기가 좋았고 임진강과 예성강, 한강 등이 가까이 있어 해로와 수로를 통한 조운이 가능하였다. 또한 산과 평야가 어우러져 있고, 한반도의 중심부에 있어 전국을 다스리기에 편리하였다. 개성은 왕조의 교체와 함께 변방에서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개성이 수도가 된 것은 무엇보다도 왕건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수도 개경에는 왕궁과 여러 종류의 중앙관청이 있었고, 고위 관료들이 거주하였으며, 최고의 물자가 모여드는 집산지이자 소비처였고, 가장 호화로운 문화의 도시였다. 5백년동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보니, 개경에는 귀중한 유물과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고려는 수도를 여럿 두는 제도를 운영했다. 서경과 동경 그리고 중기 이후의 남경도 모두 수도였던 셈이다. 다경제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서경과 동경이 가진 중요성에 대한 고려와 함께 개경을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제도로 보인다. 개경은 풍수상으로 완벽한 곳은 아니어서, 약한 지세를 보충하거나 강한 지세를 억누르기 위해 곳곳에 비보사찰을 세웠다.
벽란도는 지방의 조세와 공물을 거두어 싣고 오는 조운선과 고깃배 그리고 상선들이 드나들었다. 또한 벽란도는 관원이나 일반인들이 수로를 통해 지방으로 나가거나 개경으로 들어오는 관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의 상인이나 사신들, 심지어 아라비아 지역의 상인들까지 드나드는 국제적인 항구였다.
고려 왕실은 용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혈통의 우수성을 강조하였다. 왕실 내에서 근친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34명의 임금 가운데 태조를 제외한 이후 23대 임금들은 모두 ‘종’자를 붙인 묘호를 가지고 있다. 이는 당시 중국 황제에게 붙이는 묘호의 관례를 따른 것으로, 통일신라와 발해의 임금에게 ‘왕’자를 붙였던 관례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었다. 고려 태조는 건국 후에 연호를 ‘천수’라고 하는 등 처음부터 황제국임을 표방했다. 송나라와 요나라, 금나라 등은 형식적으로 고려의 임금을 제후로 간주하여 책봉관계를 맺으면서도, 고려가 내부적으로 스스로 황제를 칭하는 것에 대해서는 굳이 문제 삼지 않았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