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정치와_국풍문화
- 최초 등록일
- 2012.05.28
- 최종 저작일
- 2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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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의 귀족정치와 국풍문화에 대해서 정리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1.섭관정치와 국풍문화
(1).섭관정치의 성립
(2).국풍문화의 발전
2.장원의 발달과 무사의 성장
(1).장원의 발달
(2).무사의 성장
3.원정기의 정치와 문화
4.맺음말
본문내용
헤이안 시대에는 후지와라 북가가 오랫동안 정치를 장악하고 있었다. 후지와라노 요리미치에 이르러 딸들이 후사를 잇지 못하면서 그들의 섭관정치가 끝이 나고 후지와라 가문의 피가 섞이지 않은 고산조(後三条)천황이 즉위하였다. 그는 섭관가에 구애받지 않고 천황의 권위 회복을 위해 정치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1069년에는 기록장원권계소(記錄莊園券契所)를 설치하여 불법으로 취득한 장원을 정지시키고 공령의 증대를 꾀했다. 1086년에는 어린 아들 시라카와(白河) 천황에게 양위한 후 최초로 원청(院廳)을 열고 천황의 후견인으로 정치의 실권을 장악했는데, 이런 정치 형태를 원정(院政)이라 한다. 원정은 상황의 가정기관인 원청에서 별당이하의 원사(院司)에 의해 행해졌으며, 원을 경비하기위해 무사를 배치하고 한편으로 무사단을 조직하여 원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는 원의 권력으로 제어할 수 없는 엔랴쿠지(延曆寺)·고호쿠지(興福寺) 등 대사원의 무장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조치된 것으로 원정 시기에 무사의 중앙 진출이 이어졌는데, 원과 결탁하여 발전한 것이 간무 헤이시 일족이다.
헤이시 일족은 특히 다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 때 세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호겐(保元)의 난과 헤이지(平治)의 난을 제압하면서 실권을 장악했고, 고시라카와(後白河) 법황의 신임을 토대로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되었다. 아들 시게모리(平重盛)를 포함한 일족들도 고위고관에 올랐다. 키요모리는 딸을 다카쿠라(高倉)천황의 중궁으로 삼아 그 아들인 안토쿠(安德)천황이 즉위하자 외척이 되어 권력을 휘둘렀다. 이들은 수많은 지행국과 500여 개의 장원을 소유하였는데 이는 이전에 집권했던 후지와라 일족의 섭관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헤이시일족은 중국의 송과 무역에 힘을 쏟아 세토내해의 항로를 정비하여 송의 상선이 기나이 지역까지 입항하게 하였는데, 송이 가져온 고급직물과 향로·동전·서적 등은 헤이시 정권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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죤.w.홀 저, 박영재 역,『일본사』, 역민사, 1986
구태훈,『일본역사탐구』, 태학사, 2002
일본사학회 저,『아틀라스 일본사』, 사계절, 2011
아사오 나오히로 저, 연민수 역,『새로 쓴 일본사』, 창작과 비평사, 2003
박경희,『연표와 사진으로 본 일본사』, 일빛,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