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리성과 류큐처분, 오키나와의 현대적 의의
- 최초 등록일
- 2012.07.25
- 최종 저작일
- 20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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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슈리성(首里城)과 류큐처분에 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1. 슈리성 개관
2. 류큐처분 이전의 류큐왕국
3. 류큐처분과 류큐인의 대응 및 결과
3.1. 진행 과정 및 배경
3.2. 류큐인의 저항 양상
3.3. 류큐처분의 결과
4. 나가며: 슈리성에 깃든 현대사의 질곡과 류큐처분의 현재적 의미
본문내용
1. 슈리성 개관
슈리성(首里城)은 오키나와현 나하시에 위치한 류큐왕국(1429~1879)의 궁성이다. 외곽, 내곽의 이중 구조이며 오키나와현 내 최대 규모의 성곽을 자랑하는 슈리성은, ‘구스쿠 유적 및 류큐왕국 유적’으로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다. 대부분이 소실되었다가 복원된 것이긴 하지만 다른 일본의 성들과는 다르게 슈리성의 건축 양식에는 중국의 영향이 드러나 있는데, 진주홍 칠을 한 옻나무 건축물들은 중국풍을 짙게 풍기며 정전(正殿)에는 역시 복원품으로 청나라의 황제 강희제가 하사한 액자가 걸려 있다. 이렇듯 슈리성은 중국과 일본(사쯔마번) 양측으로부터 지배를 받았던 류큐왕국의 역사가 시각적으로 구현된 건축물이다.
본고는 슈리성이 류큐왕국의 궁성으로서 기능하였던 마지막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류큐처분(1879)“류큐처분”이라는 용어에는 다분히 메이지정부 중심적인 시각이 담겨 있다고 하겠으나, 현재 학계에서 마땅한 대체용어가 사용되고 있지 않으므로 필자도 그대로 사용하였다.
에 주목하고자 한다. 류큐왕국은 메이지정부가 폐번치현(廃藩置県)의 일환으로 단행한 류큐처분을 기점으로 일본의 한 현으로 편입되며 역사에서 그 자취를 감춘다. 번의 간섭을 받기도 했고 중국의 조공국이기도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독립왕국으로 400여 년을 존속했던 류큐왕국이 메이지정부의 “처분” 강행에 별다른 도리없이 멸망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그간 동아시아에서 류큐왕국이 지녔던 위상과 갑작스런 왕국의 몰락 과정에 대해 궁금증을 지니고 있었는데, 본 보고서를 준비하면서 “류큐처분”의 전말을 살피는 것으로 궁금증에 대한 대략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주제로 택한 슈리성이 류큐처분이라는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있지는 않다. 하지만 류큐처분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에서 슈리성이라는 장소가 등장하는 경우가 없지 않고, 슈리성이 류큐왕국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재이기도 한 만큼 슈리성과 류큐처분,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본고를 진행할 작정이다.
참고 자료
이지원, 「오키나와의 아이덴티티 문제와 자문화 인식」『사회와 역사』78, 한국사회사학회, 2008
양수지, 『근대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변모』, 혜안, 2002
정근식 외, 『경계의 섬, 오키나와』, 논형, 2008
호카마 슈젠著 · 심우성譯,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 동문선,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