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경제사] 일본경제발전사
- 최초 등록일
- 2002.12.03
- 최종 저작일
- 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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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본론
Ⅰ.일본경제발전의 과정
(1).명치유신후의 일본경제
(2)제1차세계대전과 그후의 일본경제
(3)제2차세계대전과 그후의 일본경제
(4)고도성장기의 일본경제
Ⅱ.일본경제발전의 요인
(1).산업구조의 고도화
(2).정부와 일본주식회사와의 관계
(3).일본인의 의식구조
(4).달러경제와의 상호공존
(5)효과적인 국내정책
결론
본문내용
1)명치유신후의 일본경제
전후 일본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차대전 이전 일본경제의 근대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고, 그 중심에는 명치유신이 있다.
명치유신(1853~77)은 일본의 봉건제적 지배체제를 타도하고 근대 천황제 국가와 일본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개혁운동이었다.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일본의 개국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1854년 「미일화친조약」,1858년「안정 5개국 조약」등 종속적인 외교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막부의 위신이 실추된 것이 개혁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개국과 갑작스러운 외국무역으로 심각한 경제혼란과 사회불안 속에서 각 계파간에 국론분열, 대립이 거듭된 끝에 막부 타도운동이 하급무사계급을 중심으로 고조되었다. 1868년 무진전쟁으로 막부정부가 전복되어 명치정부가 수립되었다. 명치정부는 천황제를 복귀시켜 국론을 통일시키면서 근대국가건설을 추진하였다. 명치정부는 막부에 이어 지방봉건권력을 중앙정부에 완전히 편입시켜 징병제 도입(1872)도입, 토지세제 개혁을 통해 군사적 재정적 기반을 확보하였다. 봉건적 특권의 박탈이 개혁주체인 하급무사계급에게까지 이르자 개혁주동주체간의 분쟁이 잇따랐다. 하급무사계급의 반란은 명치유신 핵심세력인 사이고 다까모리의 반란이 진압(1877)되면서 종결되었다. 당시 불안정했던 명치정부는 무사계급들로부터 명망이 높았던 사이고와의 사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위신을 높이는데 성공하여 오꾸보 토시미치의 정부내 지도력이 강화되었다. 이처럼 명치유신으로 봉건제를 타파한 일본은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헌법제정, 토지제도 개혁, 화폐 금융 재정제도 및 근대적 교육제도의 도입을 서둘렀다. 당시 일본은 구미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군사력 강화와 공업화를 동시에 도모하는 등 부국 강병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일본이 근대화에 착수한 19세기 후반, 세계는 섬유공업중심의 제1차 산업혁명기를 거쳐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제2차 산업혁명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식민지 쟁탈전이 과열되고 있었다. 일본조도층으로서는 구미열강에 대한 추격을 도모해야 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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