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통일 전쟁
- 최초 등록일
- 2012.11.21
- 최종 저작일
- 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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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후삼국 통일 전쟁
목차
1.머리말
2.후삼국 통일 전쟁의 배경 및 원인
3.후삼국 통일 전쟁의 전개
4.후삼국 통일전쟁의 민족사적 의미
5.맺음말
6.참고문헌
본문내용
1.머리말
신라말기 정치, 사회적 혼란은 전국적인 농민봉기와 지방 세력의 대두를 가져왔다. 결국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건국되고, 짧은 45년이지만 후삼국시대가 열렸다. 이 동안 삼국은 비록 상황에 따른 변화는 있었지만 독자적인 영역과 백성, 국가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신라가 붕괴되고 후백제와 고려의 전투에서 후백제가 패함으로써 고려는 세 나라를 통일한 국가가 되었다. 통일하는 전투 과정을 살펴보고 후삼국 통일 전쟁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2. 후삼국 통일 전쟁의 배경 및 원인
신라는 하대에 들어서면서 쇠망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정치적인 측면에서 지배계급의 분열과 타락현상이 나타났다. 중대의 마지막 왕인 혜공왕부터 권력다툼을 벌이기 시작하더니 그 이후에도 계속 권력쟁탈전이 계속 되었다. 진골귀족들끼리의 왕위쟁탈전은 신라사회의 근간이었던 골품제의 모순 내지 붕괴에 기인하였다. 또한 왕족, 귀족들은 사치적이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중 략>
또한 신라 귀족들이 고려의 정계에 들어와 활약하는 일들도 많았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신라인이 고려의 후삼국 통일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마의태자를 비롯한 일부 신라인은 신라의 귀순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강제로 접수되었기 때문에 반발 의식이 강했다. 이것이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의 한계이기도 했다.
고려태조 왕건이 집권할 당시 중국은 당말(唐末) 오대(五代)의 시기였다. 즉 혼란기여서 고려는 중국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후삼국 통일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제적인 측면에서 중국의 인정을 받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왕건은 중국과의 외교 관계에 많은 신경을 썼다. 그러나 고려는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하지 않았다. 독자적인 천자의 국가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태조 왕건이 자신을 칭할 때 ‘짐(朕)’이란 표현을 썼으며 백성들에게 내리는 문서도 ‘조(詔)’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천수(天授)’라는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도 그 증거이다. 이는 하늘이 천명(天命)을 주어 나라를 열었다는 뜻으로 중국과 대등한 천자국임을 표방한 것이다.
참고 자료
- 고려의 건국 및 후삼국 통일의 민족사적 의미, 김갑동, 2008
고창전투와 후백제의 정세변화, 유영철, 1999
-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후백제, 김갑동, 서경문화사, 2010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정 연구, 류영철, 경인문화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