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조선의 역관 신숙주에 대한 고찰.
당시 조선-명과의 관계, 조선-여진과의 관계 등
다른 나라와의 시대상황 역시 고찰. (A+)
목차
서론 - 왜 신숙주(申叔舟)인가
신숙주(申叔舟), 그는 누구인가
신숙주(申叔舟), 그 당시의 시대상황
- 조선-명(明)과의 관계
- 조선-여진(女眞)과의 관계
- 조선-일본 및 동남아시아의 관계
역관으로서의 신숙주(申叔舟)
- 대마도(對馬島) 정벌과 여진(女眞)정벌
대마도(對馬島) 정벌(1419)
여진(女眞) 정벌(1467, 1479)
-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로 본 일본과 그 가치
결론
본문내용
서론 - 왜 신숙주(申叔舟)인가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 일, 러, 중과 같은 강대국에 둘러싸인 국가로,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서는 보다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재석, 고려 전기 국제관계의 특질 p.103
따라서 외교관이 없는 한국을 생각해 보자면 끔찍하다. 외교관은 나라를 대표하여 타국과의 각종 협상 등에서 자국의 이익과 안녕을 위해 일하는 자이다. 즉, 외교관이 없다면 우리나라는 지금과 같은 국제적 입지와 위치를 갖지 못할 것이다.
조선 시대 역시 외교관이 있었다. 현대에 외교관이 있다면 조선시대에는 현대의 외교관의 업무를 담당하는 자를 역관이라 하였다. 지금 못지않게 온갖 강대국들로 둘러싸인 주변 정세에서 조선이란 나라에게 역관의 외교술은 특히나 중요했다. 그 중 우리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의 개념에 주목해야 한다. 사대교린이란 자소사대의 준말로, 역사적으로는 나라 간의 관계를 상하의 계서적 위치로 규율지우고 그 사이를 조공, 책봉 등의 제도로써 정립시키는 하나의 외교적 형식이다. 이 사대교린의 개념은 은 왕조 시대에 싹트기 시작하여 전국시대에 사대라는 글자가 직접적으로 출현하게 되었다. 한국의 역사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사대교린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규명되기 시작하였는데, 사대교린을 활용한 외교술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거쳐 더욱 확대되어 활용되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이 사대교린을 활용하여 국제적으로 실리적인 이득을 취했던 사례가 많았다. 여기에서는 조선시대, 그리고 조선시대 중에서도 신숙주(申叔舟)(申叔舟)의 외교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신숙주(申叔舟)의 외교술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알아보는 것은, 우선적으로 ①사대교린의 개념에 대하여 인식할 수 있다는 점, ②조선시대 전반의 외교술과 그 당시 조선의 국제적 입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신숙주(申叔舟)는 성삼문(成三問, 1418~1456)과 대비되며 변절자라는 평판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주로 신숙주(申叔舟)의 외교활동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다음의 본론부터는 사대교린의 외교술을 능히 펼쳤던 대표적인 학자인 신숙주(申叔舟)에 대하여, 그리고 신숙주(申叔舟)의 외교활동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참고 자료
신숙주(申叔舟) 저; 신용호 역, 해동제국기, 범우사, 2004
네이버 인물사전 - 신숙주(申叔舟)
임채명, 일반투고논문: 시문(時文)을 통해 본 신숙주(申叔舟)(申叔舟) 가계(家系)의 일본(日本)에 대한 관심, 근역한문학회; 학문학논집, 2010년
신병주, 남명학연구원; 선비문화, 신숙주(申叔舟)의 일본 기행문, 『해동제국기』, 2008
박덕규, (신숙주 평전)사람의 길, 큰사람의 길, 서울; 둥지, 1995
남지대; 서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내일을 여는 역사 제6호-인물바로보기2-신숙주-공신의 길을 택한 학자, p.4-215,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