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 순자의 성악설
- 최초 등록일
- 2002.12.05
- 최종 저작일
- 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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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
목차
1.서론
(1). 순자(荀子)
2.본론
(1). 성악설(性惡說)과 윤리
(2). 예(禮)와 윤리
(3). 도덕수양론(道德修養論)
1) 적학(積學)
2) 지행합일(知行合一)
3.결론
4.참고자료
본문내용
순자는 기원전 325년경에 조(趙)나라 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순황(荀況)이고 자는 경(卿)이다. 후대의 문헌에는 순경(荀卿)이나 손경(孫卿)으로 쓰여진 것도 있다. 이는 순과 손, 황과 경이 음이 통하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또한 순자의 생존시대는 맹자의 만년 혹은 죽은 직후에 시작하고, 진나라 시황제의 즉위 직전에까지 걸친다고 추정된다.
그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특히 젊은 시절에 관한 일은 알 수 없다. 어려서는 향리의 글방에서 배웠을 것으로 추측되며, 15세쯤에는 그의 재능이 인정되었던 것 같다. 그 후 제(齊)나라의 직하(稷下)에 유학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직하는 학술의 중심지였는데, 모든 학과가 각각의 이론을 정립하여 집필에 열심이었다. 자연스럽게 순자는 다른 학파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 후에 그는 초(楚)나라로 건너가서 노사(老師)로서 높은 대우를 받았으며, 제주(祭酒)라는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그를 모함하는 자들이 있어, B.C.265년에는 진(晋)나라로 갔다. 거기서 그는 소왕과 만나고 응후와도 문답을 나누었다. 그는 유학자가 조정에 있으면 나라의 정치가 잘 되고, 낮은 자리에 있으면 사람들을 교화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한다고 하여 유교의 덕치(德治)를 권하였다.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그곳을 떠나 초(楚)나라로 갔다. 거기서도 그는 임금에게 나아가 인정을 베풀어서 국민들의 사기를 높여주는 정치력이 군사력보다 낫다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그는 다시 초나라에 가서 난릉현의 수령이 되었다. 춘신군의 죽음과 함께 그도 사직하고, 제자 양성과 저술활동을 하다가 B.C.227년경에 그곳에서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로는 『순자(荀子)』20권 32편이 있다. 대화록(對話錄)인 『논어』, 언행록(言行錄)인 『맹자』, 운문(韻文) 형식인 『노자(老子)』, 우화(寓話)로 되어 있는 『묵자(墨子)』등, 그 이전의 모든 저작들이 비체계적이고 비논리적인 데 비하여, 그의 저술은 매우 조리 있고 체계적이다. 그래서 순자를 두고 제자백가 중에서 최후의 위대한 스승일 뿐 아니라, 제자백가를 집대성했다고도 한다.
그는 공자를 제외하고는 당시의 모든 사상을 비판하였다. 묵자는 겸애(兼愛)와 실리(實利)에 사로잡혀 예의를 몰랐고, 장자는 자연에 가리워 인간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였고, 혜시(惠施)는 말에 가리워 사물의 실질을 알지 못했으며, 신도(愼到)는 법률에 빠져서 어진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노장(老莊)의 우주론(宇宙論)을 채택하고, 성악설(性惡說)과 예(禮)와 법(法)을 중시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여러 사상을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장점을 종합하여 자시남ㄴ의 새로운 학설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순자를 유가가 아닌 종합파(綜合派)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를 잡가(雜家)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는 여러 학파의 학설들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은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다<font color=aaaaff>..</font>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