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의 출범과 원세개
- 최초 등록일
- 2012.12.26
- 최종 저작일
- 2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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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현대사 레포트입니다,
목차
1. 서론
2. 중화민국의 수립
3. 2차혁명
4. 원세개(遠世凱)의 독재와 제제(帝制)운동
5. 3차혁명(반 제제 운동)
6. 민국초기의 외교
7. 결론
본문내용
1.서론
1636년 건국 된 청(淸)조는 1840년 아편전쟁, 1894년 청·일전쟁으로 붕괴될 위기에 놓였다. 이를 타파하고자 1894년 손문(쑨원, 손중산)을 중심으로 한 혁명파들은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여“반제제, 청조타도”라는 구호 아래 혁명을 준비하였다.
이는 점차 확대되어 1905년 흥중회, 광복회, 화흥회 등이 모여‘중국동맹회’결성하였고 혁명노선에서 손문과 대립을 보였던 송교인은 1911년 상해에서 중국동맹회 중부총회를 결성하여 분파운동을 하였다.
이렇게 준비되었던 혁명은 신해혁명을 정점으로 하여 중국 최초의 공화정이라 할 수 있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의 탄생을 가져왔고 지금까지도 대륙과 대만에서 논점이 되고 있다.
2.중화민국(中華民國)의 수립
(1) 정당의 출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1912년 1월1일 남경에 수립되어 대통령 중심제의 임시 초대 대총통으로 손문, 부총통으로 여원홍이 올랐다. 정체(政體)로는 미국식 의회제도를 도입하여 참의원을 구성하고‘임시약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손문는 자신의 정치가 오래 이어지기도 전에 정치에 야망이 컸던 청조의 내각총리 원세개에게 청의 마지막 황제를 퇴위시키는 조건으로 내각책임제의「임시 약법(臨時約法)」으로 개정하고 원세개에게 제2대 임시 대총통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런데 원세개는 친위 쿠테타인‘북경 정변’을 일으켜 이를 구실로 남경에 가서 취임하여야 할 약속도 지키지 않고 북경에 그대로 있었다.
이에 당소의 내각은 남경에, 대총통은 북경에 있게 되어 행정 처리에 불편이 따랐다. 여기에 원세개는 내각책임제의 정치체제를 이해하지 못하여 내각과 자주 충돌하여 행정을 제대로 처리하기 어려웠다. 결국, 민국원년(1912년) 4월에 임시정부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북이 통일된 명실상부한 중화민국의 공화정이 시작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정당 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원세개를 중심으로 하는 구세력이 지나치게 컸을 뿐만 아니라, 정계에 있는 인물들도 공화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으로 인해 초반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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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講座 中國史 VI』,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지식산업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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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현대사』, 신승하, 대명출판사, 1992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2001
『中華民國史』, 요코야마 히로아키, 신서원,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