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테콜비츠의 생애와 작품
- 최초 등록일
- 2013.01.31
- 최종 저작일
- 2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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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연구동기 및 목표
Ⅱ. 본론
1. 예술가로서 케테 콜비츠
1) 시대적 배경
2) 화가로서의 성장과정
2. 케테 콜비츠의 작품세계
1) 1888-1908년 <직조공 봉기> <농민전쟁>
2) 1908-1914년 <가내노동> <임시숙박소>
3) 1914-1945년 <전쟁>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케테콜비츠는 1876년 7월 8일 건축기사 칼 슈미트와 그의 처 카타라니 슈미트의 다섯 번째 아이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출생한다. 그녀의 집안은 중산층 지식 계급에 속하였지만 당시의 진보적인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기들이 속해 있는 계급보다는 그 사회에서 억압받는 자, 소외된 자에 훨씬 더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외할아버지 율리우스 루프(Julius Rupp,1809~84)는 신학자로서 탁월한 목사였으며 쾨니히스베르크에 최초의 자유신앙 교구를 일으킨다. 그는 교의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 신앙 때문에 국가와 교회의 박해를 받았지만 자신의 신조를 굽히지 않는다. 말 한마디에도 신념이 담겼으며 내면에서 우러나지 않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는 외할아버지의 성자같은 진지함은 케테 콜비츠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후에 그녀의 작품과 삶에도 그대로 배어난다. 케테의 아버지 칼 슈미트 역시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사상을 지닌 진솔한 사람이었으며 이러한 비범한 집안의 분위기는 케테의 도덕적 신념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케테의 예술적 소질은 아주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정신적인 것을 높이 샀던 케테의 부모님들은 절적하고 진지한 보살핌으로 이끌어 주었다. 1885~6년 베를린 여자예술학교에서 칼 슈타우퍼 베른(Karl Stauffer Bern) 지도 아래 미술 수업을 받았으며 1887년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와 계속 미술을 공부한다. 1891년 6월 13일 어린 시절의 친구 칼 콜비츠와 결혼하면서 베를린 북부지역으로 이주한다. 여기에서 칼 콜비츠는 의료보험조합 소속의 개업의가 되었고, 케테 콜비츠는 동판화와 석판화 작업에 몰두하였다.
1893년 2월 26일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직조공들」의 초연을 보고, 1893~1897년 「직조공 봉기」를 작업한다. 1898년 「직조공 봉기」를 베를린 대전시회에 처음으로 출품하고 이듬해 1899년 베를린 분리파에 참여한다. 1903년~1908년 「농민전쟁」연작을 작업하고, ‘역사적 예술을 위한 모임’의 협회에 기부한다. 1914년 10월 22일 아들 페터가 플랑드르에서 전사한다. 1919년 1월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임명되고 교수직함을 부여받는다.
참고 자료
카테리네 크라머(1991) 『케테콜비츠 천재 여류판화가의 사랑과 분노의 자화상』, 신천문학사
카테리네 크라머(2004) 『케테콜비츠』, 신천문학사
민해숙(1995)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 케테 콜비츠』, 재원
강득희(1996) 「세 여성화가에 대한 문화사회학적 접근:케테콜비츠, 프리다깔로, 천경자」, 한국가족학회
상기된 대부분의 내용은 참고문헌에서 발췌독한 것이며, 성장과정은 『케테콜비츠 천재 여류판화가의 사랑과 분노의 자화상』(1991) p.185-187의 일생연혁을 재구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