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수묘제와 전한의 능읍
- 최초 등록일
- 2013.02.18
- 최종 저작일
- 2006.08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할인쿠폰받기](/images/v4/document/ico_det_coupon.gif)
목차
1. 서언
2. 고구려의 守墓制
①이인철의 논지
②조법종의 논지
3. 前漢의 陵邑
4. 결론
본문내용
서언
고대국가에서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국가의 확립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한반도와 중국 황하유역에서 비슷한 모습의 능원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다. 우선 능읍(능원)이라는 것은 말그대로 陵을 지키는 邑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이것은 황제가 혹은 왕이 사후에 들어가 거하게 될 陵을 지키는 것으로, 고구려에서는 수묘제라고 했다. 수묘제의 중심에 있는 것이 수묘인으로서 이들의 역할은 “수묘주소(守墓酒掃)” 즉, 묘를 지키고 청소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고구려와 전한의 능읍이 어떠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이 생겼고 이에 광개토대왕비문에 새겨진 수묘제 관한 부분을 “4~5세기 고구려의 수모제-이인철”, “광개토왕릉 수묘인구성과 능원체계-조법종-”을 통해 알아보고, 짧게 소개하고 있지만 한대의 능읍에 대해서 소개된 유경주교수의 “한대 장안성의 배치형태과 사회변화”를 통해 미약하나마 비교해 보고자 한다.
Ⅰ. 고구려의 守墓制
고구려의 수묘제의 내용에 대한 관심은 광개토대왕비문에서 시작된다. 지금까지의 연구의 주된것들은 광개토대왕의 勳績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수묘제에 대한 언급이 1775자에 달하는 비문 중 641자에 달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더욱더 높아지며, 심지어 광개토대왕비의 설립 목적에 관한 여러 가지 주장까지 있는 듯하다. 우선은 그 목적이 훈적에 대한 예우와 수묘인연호를 확립하려는 목적으로 분류하고 있다. 광개토대왕의 훈적을 기리고 수묘제의 정비를 요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하면 될 듯싶다.
수묘제에 대한 최초의 내용은 “삼국사기 신대왕 國相答夫卒.......以禮葬於質山 置守墓二十家.”부분에 등장하는데, “선왕의 능묘를 관리하는 관사의 존재와 이를 관리하는 관인의 존재가 상정되며 구체적인 수묘역을 수행하는 수묘인을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왕릉지역에서 실질적인 수묘역을 담당하는 수묘인의 경우 20가라는 기본단위를 상정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 후 왕대에도 유지되다가 후 왕대에 나타난 수묘제의 양상은 큰 변화없이 유지되다가 광개토왕의 선왕인 고국양왕대에 이르러 이와 관련된 제도의 대폭적인 개편이 진행되었다.
참고 자료
유경주, <한대 장안성의 배치형태와 사회변화>
조법종, <광개토왕릉 수묘인구성과 능원체계>
이인철, <4~5세기 고구려의 수묘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