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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13.02.22
- 최종 저작일
- 2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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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17세기(17C)의 한국정세와 세계정세
1. 정묘호란
2. 병자호란
Ⅱ. 18세기(18C)의 한국정세와 세계정세
1. 여성의 경제력 향상
2. 언문의 보급
3. 종교
4. 혼인의 3대 문제
5. 여성의 사회진출
Ⅲ. 19세기(19C)의 한국정세와 세계정세
1. 국내
2. 유럽
Ⅳ. 20세기(20C)의 한국정세와 세계정세
Ⅴ. 21세기(21C)의 한국정세와 세계정세
본문내용
Ⅰ. 17세기(17C)의 한국정세와 세계정세
1. 정묘호란
1623년 서인들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대북 세력이 몰락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반전되었다.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하는 서인들은 광해군과 대북 정권의 중립적인 대외정책을 친명 배금 정책으로 바꾸어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 하였다. 조선의 친명 배금 정책과 함께 명의 장수 모문룡이 조선의 가도(평안도 철산 앞바다에 있는 섬)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후금은 크게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 무렵 인조반정에 참여했던 이괄이 자신만이 이등공신에 책봉된 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반정 실패 후 그는 후금으로 도망가 인조반정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서인정권을 응징할 것을 종용하였다.
인조 4년(1626년), 왕자 시절부터 조선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했던 홍타이지(태종)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후금의 조선에 대한 정책도 변하기 시작하였다. 호전적인 홍타이지는 조선의 친명 정책과 모문룡의 가도 주둔을 문제 삼으면서 조선에 쳐들어 왔다. 그는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명분을 걸고 3만 명의 군사를 일으켰다.(정묘호란, 인조 5년, 1627년)
전쟁이 시작되자 후금군은 의주, 정주, 선천, 곽산 등지를 거쳐서 황해도 평산까지 육박해오면서 일부는 가도를 공격하였다. 이 사이 용골산성과 의주지방에서 정봉수 등이 의병을 조직하여 항전하였지만 후금의 군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하였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조선 정부 내에서 화의론이 대두하였고 후금 또한 장기 출병이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양국 간에 강화 교섭이 시작되었다. 후금은 강화 교섭 3일 만에 ‘강화서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강화서약으로 조선은 후금과 ‘형제지맹(형제의 나라)’을 맺게 되었다.
참고 자료
고석규, 19세기 조선의 향촌사회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김문식, 박지원이 파악한 18세기 동아시아의 정세, 민창사, 2005
동아시아국제정치학회, 21세기 동북아정세와 한국, 2001
최완기, 17세기의 위기론과 효종의 경제정책, 국사편찬위원회, 2000
한국전략문제연구소, 20세기 안보정세 종합평가, 1999
홍현익, 21세기 동북아 정치정세 전망, 한국무역보험공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