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읍성][남한산성][행주산성][가산산성][만리장성][공주공산성][강동성]낙안읍성, 남한산성, 행주산성, 가산산성, 만리장성, 공주공산성, 강동성 분석(낙안읍성, 남한산성)
- 최초 등록일
- 2013.02.22
- 최종 저작일
- 2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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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낙안읍성][남한산성][행주산성][가산산성][만리장성][공주공산성][강동성]낙안읍성, 남한산성, 행주산성, 가산산성, 만리장성, 공주공산성, 강동성 분석(낙안읍성, 남한산성)
목차
Ⅰ. 낙안읍성
Ⅱ. 남한산성
Ⅲ. 행주산성
Ⅳ. 가산산성
Ⅴ. 만리장성
Ⅵ. 공주공산성
Ⅶ. 강동성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낙안읍성
낙안읍성은 대개의 성곽이 산이나 해안에 축조되었는데 반해, 들 가운데 축조된 야성으로 외탁과 내탁 의 양면이 석축으로 쌓여 있는 협축으로 이루어졌다는 큰 특징이 있다. 이곳 낙안 평야지에 있는 읍성으로서 연대를 살펴보면 조선 태조 6년(1397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하였다. 그 후 인조 4년(1626년 5월 ~ 1628년 3월) 낙안 군수로 부임한 충민공임경업군수가 석성으로 개축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에 의하면 세종6년(1423)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 내용에 "낙안읍성이 토성으로 되어 있어 왜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읍민을 구제하고 군을 지키기 어려우니 석성으로 증축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왕이 승낙하여 세종9년(1426) 되던 해에 석성으로 증축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이설이 있다.
<중 략>
이 시기에 공산성에는 성곽과 함께 왕궁이 건설되고 임류각이나 연지 같은 왕권을 상징하는 건물들도 마련하였다. 또 공산성은 전략적 중요성으로 수많은 환란을 겪어야 했다. 공산성에 있는 명국삼장비와 쌍수정사적비는 바로 그런 사실을 말해주는 자취이다. 공산성은 조선시기 충청도의 전략거점으로서 발굴조사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각종의 군사시설이 마련되어 있었고 성곽도 선조, 인조시대에 대부분 현재와 같은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공산성은 `택리지`에서 기록한대로 "성안에 군량과 군기를 저장하여, 강화, 광주와 함께 전략적인 중요한 지역" 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에게 공산성이 더욱 값지게 보여 지는 까닭은 역사와 문화유적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와 문화와 함께 정이 깃든 수려한 자연이 있기 때문이다. 공산성에는 금강을 바라보며 한가롭게 산책할 성벽이 있고, 우거진 숲과 숲 사이의 산책로도 있다. 그리고 계룡산과 차령산맥이 한눈에 들어오고 비단결과 같은 금강이 발아래 에서 찰랑인다. 가족과 함께 연인과 함께 공주의 역사와 문화를 느끼면서 수려한 풍광 속에서 자연이 주는 여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곳이다.
공산성은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레저시설이다. 편의시설들은 없지만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부담 없는 사람들끼리 더욱더 어울려 자연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 몇 안 남은 아껴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길종원 외 1명(2010), 낙안읍성의 공간구성 변화에 관한 조사연구, 한국농촌건축학회
박영순(2006), 행주산성, 국토연구원
이재돈(2003), 만리장성, 대한민국해군
안승주(1984), 공주 공산성에 대하여, 국립문화재연구소
최재헌 외 1명(2012), 산성도시 남한산성의 도시 기능성 변화, 한국도시지리학회
허연(2004), 가산산성 축성기문 소고, 박약회대구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