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중국정책
- 최초 등록일
- 2013.02.28
- 최종 저작일
- 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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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해군시기 조선과 중국의 관계와 광해군을 중심으로한 조선의 대중국 정책에 대한 리포트입니다. 각주와 참고자료는 형식에 맞추어 작성했습니다.
목차
1. 들어가며 - 임진왜란부터 광해군 시기까지의 동아시아
2. 제 1장 광해군의 변(辯); 조선의 안전과 국력 회복
3. 제 2장 신료들의 변(辯); 성리학, 기득권, 또 다른 국익
4. 마치며 - 조선을 위한 길
본문내용
국제관계는 현실정치이다. 특히 기존의 균형이 깨지고 패권의 이동이 생기는 과정에서의 국제관계는 철저하게 현실논리에 의해 좌우된다. 광해군 전후의 국제관계는 중국, 한반도, 일본 간의 동아시아 전쟁이 오갔던 시기이며 일본의 정권교체, 한반도의 정권교체 그리고 중국이라는 패권국가의 주인이 한족에서 만주족으로 바뀌던 시기이다.
광해군이 즉위할 때 조선은 이미 임진왜란의 피해로 전 국토가 황폐화되어있었다. 국가의 각종 허점들이 드러남은 물론, 왜군뿐만 아니라 구원군으로 참전한 명군 역시 민간에 대한 수탈을 자행하여 전 민중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국토의 생산량은 격감하였다. 전쟁 와중에 도성의 궁궐도 소실되었고 명군에 대한 군량지원 등으로 조선 조정 역시 넉넉하지 못했다. 그러나 왜란을 종결짓는데 명군의 도움을 받은 까닭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명분을 중심으로 명에 대한 조선의 의지는 더욱 심화되었다.
< 중 략 >
중원의 형세가 참으로 위태로우니 이러한 때에는 안으로는 자강을, 밖으로는 기미하는 것을 꾀하여 한결같이 고려가 했던 것처럼 해야만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의 인심을 보면 안으로는 일을 분변하지 못하면서 밖으로 큰소리만 친다. …… 무장들이 말한 것은 모두 압록강에 이르러 결전해야 한다는 것이니 그 뜻은 참으로 가상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의 무사들은 서쪽 변방을 사지(死地)처럼 두려워하는가. 생각이 한참 미치지 못하고 한갓 빈말뿐이다……. 『광해군일기』 권166 광해군 13년 6월 병자. 한명기, 앞의 책, pp237에서 재인용.
이와 같은 생각을 통해서 광해군의 치세에 조선은 국부의 손실이 있었을지언정 국토는 타국의 위협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했으며 임진왜란 이후 새로운 국제질서의 희생양이 되지 않았다. 광해군의 판단은 조선이 변화하는 국제정세에서 그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한 역할을 수행할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정책은 신료들과의 적절한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로 이루어졌으며 결국 인조반정이라는 사건을 끝으로 조선의 중국정책은 친명배금의 일변도로 흐르게 된다.
참고 자료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푸른역사, 2009
장페이페이 저, 김승일 역, 『한중관계사』, 범우, 2005
윤종영, 『역사의 아웃사이더』, 혜안, 2006
기시모토 미오·미야지마 히로시 저, 김현영·문순실 역,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역사비평사, 2003
김용삼, 『재미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월간조선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