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조선의 고민과 아이러니
- 최초 등록일
- 2013.02.28
- 최종 저작일
- 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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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훈의 남한산성이라는 소설을 읽고 그 주제와 관련하여 당시 시대상과 조선의 내부사정, 성리학적 세계관의 균열 등을 내용으로 한 리포트입니다. 각주 및 참고문헌은 양식에 맞추었습니다.
목차
1.들어가며
2.지키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길을 선택한 조선 정권의 아이러니
3.현실과 유리된 성리학
4.나가며
본문내용
조선은 국가의 개창부터 성리학을 표방했다. 불교의 폐단을 경험한 고려 말 신흥 정치세력은 불교의 대안으로 성리학에 주목했고 불교를 강하게 비판한 급진적 성향의 개혁세력이 결국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창하게 된다. 조선 초기 설정된 명과 조선의 관계는 200여 년 동안 외부로부터 어떠한 충격도 받지 않은 채 장기간의 평화체제를 구가했다. 이러한 명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성리학으로 세계를 설명하던 조선의 관념에 17세기경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명과 전쟁을 일으키며 세력을 넓혀나가는 청(淸)이라는 새로운 국가의 등장이었다. 조선의 인조와 신료들은 청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친명배금정책을 고수하고 결국 병자호란이라는 침입을 당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비록 현실 정세와 백성들의 삶을 반영하지는 못했으나 정권을 지키고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위험한 길을 택해야 했던 당시 조선의 아이러니와 지식인들의 고민을 살펴보려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성리학적 세계관이 갖는 평화적 속성과 그것에 균열이 발생하는 상황을 고찰하고,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정권이 성리학의 명분론에 집착했던 이유를 살펴본 뒤 그것이 백성들과 유리되어 있었음을 살펴본다. 끝으로 논지를 정리하고 현실 설명력이 부족했던 당시 성리학의 한계 속에서 지식인들의 고뇌와 새로운 질서의 등장에 대응하여 나아간 성리학의 방향성을 간략하게 짚어보며 글을 마무리한다.
< 중 략 >
화와 이의 구분을 뚜렷이 하고 중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은 17세기 무렵 현실을 설명하는데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조선에 조공을 바치기도 하던 변방의 부족인 여진족이 조선과 대등한 위치에 오르게 되는 것은 물론, 더욱 세력을 확장하여 급기야 유일한 상국인 명과 대립하고 황제를 칭하기에 이른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청의 군대가 남한산성에 도착한 뒤에도 조정의 지식인들은 화전 양론으로 나뉘어 격렬한 대립을 하고 있었다. 주화론과 척화론의 대립은 조정의 신료들 간에는 자신들의 이념과 정치생명을 걸고 하는 극한 논쟁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어육(魚肉)이 되고” 섬과 산성으로 종묘와 조정이 피난 가 있는 당시 상황에서는 비현실적이며 무책임한 태도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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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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