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대외관계
- 최초 등록일
- 2013.03.29
- 최종 저작일
- 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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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대외관계를 명나라, 일본으로 나누어 정리했습니다. 책을 위주로 정리한 것이니 참고해주세요.
목차
조선의 대외관
명과의 대외관계
-대명정책
-사신의 왕래
-무역
일본과의 대외관계
-성격에 따른 시기구분
-조일국교의 전개
-왜구대책
-대마도정벌
-통교체제의 확립
-사절단의 왕래
-물물교류
-조선의 일본인식
본문내용
조선의 대외관
흔히 조선의 대외정책을 사대교린이란 말로 압축하여 표현한다. 중국에 대해서는 성(誠)으로써 사대외교를, 일본과 여진 등에 대하여는 신(信)으로써 교린외교를 펴나간다는 것이 조선의 사대교린정책이다. 조선의 사대교린은 곧 《맹자(孟子)》에 나오는 「지자(智者)의 事大(사대)」와 「교린(交隣)의 도(道)」를 결합시킨 용어이며, 「인자(仁者)의 사소(事小)」라는 개념을 버리고 대신 「교린」의 일반적인 의미를 축소시켜 일본 ․ 여진 등에 적용시키고 있다.
※명과의 대외관계
대명정책
⑴ 고려말의 대명관계
조선왕조가 수립된 해는 명 태조 홍무 25년(1392)에 해당되는데, 이 때는 명이 건국되어 고려와도 통교를 시작한 지 이미 4반세기가 지난 시점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의 대명관계는 고려말 대명관계의 연장선 위에서 전개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명관계에서 고려말과 조선초를 한 시대로 묶어 파악하게 되는 것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으로부터 조선 태조 7년 (1398)까지 31년간 지속되었던 명 태조 홍무정권의 존재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고려와 명의 관계와 조선과 명의 관계는 대체로 모두 명 태조 홍무정권의 대외정책에 의해 주도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러므로 조선 태조 재위 7년간의 대명관계는 그 이후의 대명관계보다도 오히려 그 이전인 고려 공민왕 17년 이래의 대명관계와 전개양상이 유사한 점이 많았다.
고려가 명과 책봉(冊封)관계를 성립시킨 것은 명조가 수립된 직후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공민왕 18년 명 태조가 부보랑(符寶郞) 설사(偰斯)를 고려에 파견하여 명조의 수립을 통고하였을 때 원말의 동란을 틈타 반원정책을 점진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공민왕은 크게 환영하였다. 공민왕은 원의 「지정(至正)」연호를 즉각 폐지하는 한편, 예부상서(禮部尙書) 홍상재(洪尙載)와 감문위상호군(監門衛上護軍) 이하생(李夏生)을 하동극사(賀登極使)로 남경(南京)에 보내고 명 태조에게 봉작(封爵)을 요청하였다. 이들을 맞은 명 태조 역시 크게 기뻐하며 공민왕을 고려왕에 봉한 다음, 다시 설사로 하여금 금인(金印), 고문(誥文), 대통력(大統歷)을 고려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이를 받은 고려는 명의 「홍무」연호를 쓰기 시작함으로써 명과 고려의 책봉관계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원을 타도하고 배척하려는 공동의 목표를 지니고 있던 명과 고려 양국은 참으로 신속하고도 적극적으로 우호적인 양국관계를 성립시켰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