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시기 역사학의 궤적
- 최초 등록일
- 2013.03.31
- 최종 저작일
- 20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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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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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문화대혁명 우리에게 무엇인가?
2. 문화대혁명 시기의 역사학 채방(採訪)
3.문화 대혁명 휴기 역사교육과 연구의 부활
4. 혁명사학으로서 ‘영사사학’의 의의
5. 맺음말
본문내용
1. 문화대혁명 우리에게 무엇인가?
1976년 마우쩌둥이 사망한 이후 특히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中全會)가 마우쩌둥의 “원화따거밍”을 부정하고 덩샤오핑 주도로 개혁개방 노선을 추구하게 되자, 중국 바깥에서 자신의 대의와 중국 사회주의혁명의 이상주의 노선을 동일시하고 있던 많은 지식인들은 신념의 공황에 빠졌었다. 더욱이 1976년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를 계기로 사상해방과 실사구시 노선에 따라 개혁개방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문혁은 오랫동안 필자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1970년대 말 이후 나도 모르게 형성된 마오찌 등 노선에 대한 필자의 비판적 시각도 중요한 원인이였다. 텐안먼사건을 일으킨 학생들의 민주화 노선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자오쯔양(趙자陽)이나 리수(려수, 1912-1988) 등이 상대적으로 급진적인 개혁노선을 지지하였다. 또 1922년 이후 적극적으로 장려한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1990년대 말부터 국가독점 자본주의의 성격을 보이고, 중국사회의 모순이 심화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1992년 한중수교 전후부터 필자가 맞닥뜨린 중국에 대한 정보의 홍수 역시 문혁에 대한 필자의 견해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1991년 1월 하순 베이징에서 열린 동양사학회 동계연토회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 중국을 방문한 이래 필자는 거의 매년 한두 차례 개혁개방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이 모습을 확인해 왔다. 특히 2000년 8월부터 1년 동안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온몸으로 문화대혁명과 부대낀 사람들을 만나면서 문혁에다한 지식도 늘고, 인식도 바뀌었다. 또 문혁 시기에 출판된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도 입수하게 되었다. 특히 2006년 10월 20일 함림대학교 아시아문화 연구소가 주최한 문혁 개시 40주년기념 심포지엄에 발효할 논문을 준비하면서 문혁 시기의 자료와 문혁에 관한 글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검토할 수 이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역시 필자의 문혁 인식에 중요한 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