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한산도대첩과 진주대첩을 비교 대조한 글입니다.
전투 이전 상황배경, 전투의 전개, 전투의 의의와 이후 미친 영향까지
여러 책과 논문을 참고하여 다각도로 비교 대조하였습니다.
`전투`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쓴 글입니다.
성적은 에이뿔입니다.
목차
0. 들어가며
1. 전투 이전 상황과 배경
2. 전투의 전개
3. 전투의 의의와 이후 임진왜란의 향방에 미친 영향
4. 두 전투의 공통점
5. 나가며
본문내용
1. 전투 이전 상황과 배경
1592년 4월 임진왜란 발발 후 조선은 20일 만에 서울을, 6월에는 평양을 빼앗기는 등 연이은 패배로 선조는 개성, 평양, 의주로 계속 파천 중이었다. 나라의 형세는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한편, 조선 수군도 전쟁 초반에는 속수무책으로 왜군에게 당했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할 당시 박홍이 이끄는 경상좌수군은 전투를 피하기 위해 멀쩡한 배를 자침시켜버리기까지 했다. 이에 일본 수군은 쉽게 경상도 해역을 장악하고 서해를 돌아 빠르게 진격하고 있던 육군의 보급을 충실히 담당하고 있었다.1)
그러나 이후 5월부터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주도로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옥포에서 26척, 합포와 적진포에서 16척, 사천해전에서 13척, 당포에서 21척, 다항포에서 30척, 거제도 율포에서 7척의 적선 격침 등 수군의 활약이 돋보이고 있었다. 일본 수군의 연패 소식에 놀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함을 총동원하여 조선수군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 략>
한산도대첩과 진주대첩의 공통점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전투는 대첩이라고 명명되고 있다는 점이다.15) 이들 전투를 대첩이라고 하는 것은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의 적을 격퇴시켜 다른 어느 전투보다 크게 이겨 적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16) 앞에서 말했다시피 두 전투의 승리는 물자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왜군의 수륙병진작전을 무력화시켰고, 호남과 남해안을 지키는 큰 수확과 함께 조선이 그간의 패배를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두 전투의 지휘관 모두 의심할 여지없이 훌륭한 장군들이다. 이순신 장군과 김시민 장군 모두 첩보에 뛰어났다. 전쟁의 승패는 정보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장군은 전투에 앞서 현지주민은 물론 왜군 점령지역에 침투시켜 둔 정탐꾼으로부터 적의 동향에 대한 정보를 꾸준히 수집하며 대비했다. 또 두 장군 모두 임진왜란이 끝나기 전에 전사하였고 시호가 충무(忠武)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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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지마 만지(北島萬次),「제1차 진주전투의 경위와 제2차 진주전투의 요인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