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로서의 체육
- 최초 등록일
- 2013.04.14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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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무예로서의 체육
2. 삼국시대의 무예 체육
3. 고려시대의 무예체육
4. 조선시대의 무예체육
본문내용
-무예로서의 체육
원시사회가 해체되면서 인간 집단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이로 인해 전쟁이 발생했기에 인간은 자신과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신체를 단련 전투기술을 연마하기 위한 무예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삼국 성립 이후 정복과 전쟁이 빈발하면서 체육도 전투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무예를 중심으로 행해졌다. 고구려는 매년 3월 낙랑언덕에서 왕과 귀족들을 비롯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여 수렵을 통해 전쟁에 필요한 전투 증력을 배양하였고 신라는 무예를 장려하기 위해 활쏘기로 인재를 뽑았다. 하지만 이때의 무예활동은 계층간에 차이가 있었다. 귀족들은 주로 말을 타고 하는 무예연마에 치중, 일반인들은 수박, 씨름 등 신체를 이용한 무예를 연마했다.
고려시대 무예는 무(武)를 담당하는 군박씨족(軍班氏族) 중심으로 행해졌다. 그만큼 무예의 기반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문벌귀족이 무신을 천대하는 등 상무적 기풍이 삼국 때보다 약해졌지만 국초부터 이민족의 잦은 침입으로 무예는 여전히 중요시 되었다.
한편 무예체육은 경기의 형식을 갖추고 행해지기도 했다. 한 명이 여럿을 상대하는 오병수박희(五兵手猼戱)가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격구도 왕이 직접 행하였고 귀족들도 즐겨 관람하는 경기로 성행했다. 그리고 군사들은 격구를 통해 기마술을 연마했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함으로써 당시 문치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하지만 고려 말 잦은 외적의 침입으로 무예를 중요시하는 풍조는 조선 초에도 여전했다. 특히 무과(武科)를 실시하여 무관(武官)의 선발을 제도화하였고 병농일치제(兵農一致制)를 채택하여 국민 모두에게 군역의 의무를 부과했다. 이로써 일반 백성들도 각종 무예를 익혀야만 했으며, 정부차원에서도 평상시 무예를 습득하도록 강요했다. 심지어 병장기 휴대를 의무화 하기도 했다. 때문에 무예체육도 체계화되고 제도화될 수 있었다.
-삼국시대의 무예체육
삼국 초에는 귀족층이 군사활동을 전담하면서 무예체육도 이들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그러다가 전쟁이 빈발하면서 평민들로 구성된 정규군대 편제와 더불어 무예체육은 그 저변이 확대되었고, 체계적으로 실시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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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한국체육사연구.2003 이 학래 著
한국전통무예의 체육철학.2006 김 부찬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