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비교 연구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국신학정보연구원 홈페이지의 ‘같은 본문 다른 설교’ 게시판에 있는 글 하나에 대한 언급을 하도록 하겠다. “하나의 본문은 하나의 의미를 지니는가?”라는 제목으로 한 본문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글이다. 그 근거로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한 가지씩 평가를 하고 총평을 하도록 하겠다.첫째, 성경본문 자체가 해석의 다양성을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한다. 글쓴이는 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성경이 역사와 계시의 기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원 저자는 해석의 다양성을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증거로 신약의 기자들이 구약을 새로운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시편과 이사야 등을 인용하시며 자신의 구속사역과 연관되어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했으며, 신약 기자들도 그러했다는 것이다.
글쓴이의 주장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 구약의 예언들은 대부분 시대적 정황에 따른 예언인 동시에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 때문에 선지자들의 외침은 정황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해석의 차이를 해석의 다양성이라고 표현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즉 성경 기자가 역사적으로 있을 사건과(e.g.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귀환) 동시에 메시야 사상을 의도하고 있었다면 예표적 성격을 뛴 메시야 구절로 이해해야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이유로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준다면 포로기 이후로부터 신약시대에 있었던 유대인들의 메시야 이해에 대해서도 판단을 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현재의 사람들에게도 이와 동일한 해석의 범주를 열어줄 수 있는 위험을 갖게 된다.
둘째,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 방법론이 다양하기 때문에 하나의 본문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풍유적 해석, 문법적-역사적 해석, 교권 중심적 해석,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해석, 등 다양한 해석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한 본문에 대한 해석 방법론(접근법)이 다양하다고해서 해석이 달라진다고 할 수는 없다.(해석이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저자의 의도를 따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글쓴이는 서두에서 글의 제목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며 “하나의 본문이 단 하나의 의미만을 지닌다고 쉽게 단정 짓는 것은 더더욱 우리를 어렵게 만든다. 만일 그렇게 단정 짓는다면 동일 본문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 중 단 하나의 해석만 옳고 나머지는 모두 잘못된 해석이라고 심판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글쓴이의 두 번째 주장을 따르자면 오히려 어떠한 해석에 대해서도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근거를 갖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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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본문내용
글쓴이의 주장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 구약의 예언들은 대부분 시대적 정황에 따른 예언인 동시에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 때문에 선지자들의 외침은 정황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해석의 차이를 해석의 다양성이라고 표현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즉 성경 기자가 역사적으로 있을 사건과(e.g.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귀환) 동시에 메시야 사상을 의도하고 있었다면 예표적 성격을 뛴 메시야 구절로 이해해야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이유로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준다면 포로기 이후로부터 신약시대에 있었던 유대인들의 메시야 이해에 대해서도 판단을 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현재의 사람들에게도 이와 동일한 해석의 범주를 열어줄 수 있는 위험을 갖게 된다.둘째,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 방법론이 다양하기 때문에 하나의 본문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풍유적 해석, 문법적-역사적 해석, 교권 중심적 해석,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해석, 등 다양한 해석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한 본문에 대한 해석 방법론(접근법)이 다양하다고해서 해석이 달라진다고 할 수는 없다.(해석이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과연 저자의 의도를 따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글쓴이는 서두에서 글의 제목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며 “하나의 본문이 단 하나의 의미만을 지닌다고 쉽게 단정 짓는 것은 더더욱 우리를 어렵게 만든다. 만일 그렇게 단정 짓는다면 동일 본문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 중 단 하나의 해석만 옳고 나머지는 모두 잘못된 해석이라고 심판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글쓴이의 두 번째 주장을 따르자면 오히려 어떠한 해석에 대해서도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근거를 갖지 못할 것이다.
셋째, 성경을 대하는 사람의 실존적 정황에 따라 하나의 본문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억압받는 제 3세계 국가의 기독교인은 미국과 같은 강대국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해방신학을 비롯한 다양한 신학사상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글쓴이의 이러한 주장은 성경해석에 대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지속될)현실을 말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성경해석자가 가져야 할 기본자세는 성경에 의존할 뿐 아니라 성경을 표준으로 삼음에 있다. 즉 본문(text)이 상황(context)에 대하여 항상 우선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본문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겠지만 그 다른 해석이 해석자의 실존적 정황에 따른 해석이라 하더라도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