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슬을 통해서 본 제주4.3사건과 목회윤리
- 최초 등록일
- 2013.04.30
- 최종 저작일
- 20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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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는 글
Ⅱ. 몸 글
1) 사건의 발단 (사회적 문제)
2) 사건의 전재 (3.1운동 발포사건부터 미군의 개입까지)
3) 사건의 절정 (협살 실패로부터 무자비한 학살극까지)
4) 사건의 종식
5) 사건 이후
Ⅲ. 나가는 글
본문내용
1. 들어가는 글
최근 ‘지슬’이란 영화를 통해 제주 4.3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제주 4.3사건에 대해서는 생소하다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대중들의 수면위로 드러나지 않은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국가의 존속적인 측면에서 3.1운동은 누구나 적법하다 하며 누구나 참여해야 마땅하다고 평가하지만 그 외에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투쟁과 불순한 정치에 민주적으로 항쟁하고자 하는 운동에서는 ‘사태’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국가의 국민으로서 부끄러움을 자아내고 있다는 평가이다.
민주화를 위한 투쟁, 하지만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소수의 피해를 참아내야 했던 비극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오늘날 생명윤리적인 측면에서의 목회적 관점으로 이러한 비극의 역사를 재평가해보려 한다.
Ⅱ. 몸 글
먼저 제주 4.3사건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려한다. 제주 4.3사건이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으로, 일본 패망 후 한반도를 통치한 미군정에 의한 친일세력의 재등장과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남조선노동당을 중심으로 반대하는 과정에서 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된다.
1) 사건의 발단 (사회적 문제)
제주 4.3사건의 발단은 사회적인 문제로부터 들여다볼 수 있다. 지리적 특성상 동북아 요충지였던 제주도는 일제시대 에도 약 6만 명의 군인들이 주둔한 곳이었다. 이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적 기지였다. 광복 후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피신하였던 제주 주민들이 귀환하였으나 이들은 직업을 구하기 힘들고 생활형편이 모두가 좋지 않아 생업을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또한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병으로 수백 명이 희생하고, 흉년까지 들게 되어 제주 주민들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해방을 맞았지만 일제의 잔재가 남아 친일행위를 했던 경찰들이 다시 미군정 하에 치안을 맡게 되어 군정경찰이 되고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채웠기 때문에 이러한 요건들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