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과 그리스도교 제국
- 최초 등록일
- 2013.05.11
- 최종 저작일
-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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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콘스탄틴의 집권 과정과 교회
2. 콘스탄틴 집권 후 정책
1) 교회의 논쟁
① 도나투스 논쟁(아를르 공의회)
② 아리우스 논쟁(니케아 공의회)
2) 콘스탄틴과 교회의 성장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콘스탄틴 대제가 즉위하면서 기독교는 세속 국가에게 박해를 받던 처지에서 국가와 결합하는 처지로 급격한 위상 변화를 겪었다. 국교회 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역사상 가장 고도로 발달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던 우상 숭배 형태인 그리스-로마의 이교는 3백 년에 걸친 투쟁 끝에 기독교에 무릎을 굻고 원기를 다 소진한 채 “갈릴리인이여, 당신이 이겼소!”라는 고백을 남기고 소멸했다. 문명 세계의 군주가 면류관을 벗어서 십자가에 달렸던 나사렛 예수의 발 앞에 놓았다. 네로·도미티아누스·디오클레티아누스의 계승자가 황제의 의관을 갖춘 채 교회의 보호자로서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하여, 여전히 박해의 상처를 지니고 있던 감독(주교)들의 승낙을 받아 황금 보좌에 앉았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낮은 땅에 오셔서 머리 둘 곳도 없으셨던 구주와 똑같이 멸시를 당하던 작은 신앙 집단이 제국을 지배하는 군주의 지위로 올라섰고, 이교의 사제들이 누리던 특권을 누리게 되었고, 부와 권력이 날로 커졌고, 우상의 신전들에서 채취한 석재들로 그리스도와 그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무수한 예배당을 건립했고, 그리스와 로마의 지혜를 사용하여 이교 세계에 미련하게 보였던 십자가의 도를 선양했고, 제국의 입법 활동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제국의 사회 생활을 관장했으며, 세계사의 흐름을 주도했다. 그러나 동시에 위로는 가이사르부터 아래로는 비천한 노예에 이르는 제국의 방대한 인구를 끌어안고, 기존의 모든 제도들 속에서 지내는 과정에서, 세상과 이교로부터 이질적인 요소들을 허다히 품게 되면서 새로운 위험들에 노출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교회와 국가의 결합은 어떤 때는 건강한 형태로 다른 때는 해로운 형태로 교회사의 모든 부분에 그 영향을 확대해 놓았다.1)
<중 략>
교회와 국가를 지상에 수립된 신적 정부의 두 팔로 간주하는 정치 체제를 최초로 추구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콘스탄틴은 복음의 도리를 충분히 깨닫지 못한 채 기독교를 정치와 결합하고, 평화의 거룩한 상징을 전쟁의 공포와 결합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영적 관심사를 국가의 지상적 관심사와 결합시킨 전형적 인물이기도 하다.
콘스탄틴은 정치적 식견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시대의 흐름의 선두에 서서 로마 제국에서 우상 숭배가 수명을 다했다는 것과, 기독교만이 제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도덕적으로 제국을 떠받쳐 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꿰뚫어 보았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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